
[이승현 기자] 공연이 시작할 무렵 작지만 알 수 없는 아우라를 지닌 한 사람이 무대 위에 올랐다. 그는 무대 중앙에 나와 걸걸한 목소리로 공연 안내 멘트를 했다. 밴드의 연주와 함께 공연이 시작되자 그는 무대 한편의 작은 의자에 앉아 무대로 걸어 들어오는 헤드윅을 지켜보고 있었다. 헤드윅을 향한 그의 시선에 눈길이 간 건 그때부터 였다.
최근 bnt뉴스는 뮤지컬 ‘헤드윅’에서 트랜스젠더 록커 헤드윅의 남편 이츠학 역을 맡은 가수 겸 배우 제이민을 만나 이야기를 나눴다. 이츠학과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해맑게 웃으며 인사하는 그에게 낯설면서도 묘한 매력이 전해졌다.
‘헤드윅’이 국내에서 첫 공연을 올린지도 10여 년이 흘렀다. 장기간 많은 관객들에게 사랑을 받으며 두터운 팬층을 보유하고 있는 만큼, 새롭게 합류한 제이민에게도 기쁜 만큼 부담감이 동행했을 터. 이에 제이민은 “기쁜 만큼 부담도 컸다”며 솔직한 마음을 드러냈다.
“이번에 ‘헤드윅’을 처음 접했어요. 영화를 보고 오디션을 준비하면서 왜 이렇게 오랜 시간 사랑받아온 작품인지 알겠더라고요. 10년 동안 많은 선배님들이 참여하신 작품이고 두터운 팬 층을 가진 작품이잖아요. 저보다 더 작품을 잘 아실텐데 그 분들 앞에서 내가 뭘 어떻게 보여드려야 될 지 많은 고민이 됐죠.”

# 제이민, 그리고 이츠학
이츠학은 헤드윅의 남편으로 배우 서문탁, 이영미, 백민정, 임진아, 전혜선, 최우리 등이 소화했던 캐릭터. 한때 최고의 드랙퀸이었지만 모든 걸 내려놓고 헤드윅을 따라 나선 이츠학의 감정은 복잡하다. 제이민 역시 “리허설을 할수록 작품의 무게가 크게 다가왔다”며 입을 열었다.
그런 그에게 현실적인 조언을 해준 것은 배우 조승우였다고. 조승우는 독하고 모질게 제이민에게 충고를 해줬고 그 말들은 제이민의 독기를 끌어올렸다. 해내고 만다는 독기로 무대에 오른 제이민은 공연을 성료한 뒤 조승우에게 칭찬을 받았던 모습을 회상했다. 무대 위 뿐 아니라 뒤에서도 연결된 그들의 관계가 헤드윅과 이츠학, 그 연장선처럼 보였다.
“이츠학은 헤드윅 그늘 아래 있어야 더 빛나는 캐릭터 같아요. 그 그늘에 가려져서 기도 잘 못 펴고 억압당하는 것들이 쌓이고 쌓여 ‘롱 그리프트(Long Grift)’ 후 헤드윅과의 감정적 충돌, 그리고 가발을 건네받았을 때의 전율이 터지는 거잖아요. 그런 대비가 강하게 되면 될수록 폭발력은 더더욱 클 거라고 생각했죠.”

“‘헤드윅’은 인터미션이 따로 없어요. 두 시간이 넘는 시간동안 무대에 계속 있지만 눈에 띄지는 않아요. 무대 위에 있어도 관객들의 시선을 받지 못하지만 이마저도 제게 피가 되고 살이 되는 느낌을 받곤 해요. 계속 제 감정을 끌고 가야하잖아요. 그리고 헤드윅의 말에 반응해야하고 관객들에게 잘 안 보이니 명확하게 표현하려고 노력 했어요.”
이츠학을 설명하는 제이민의 눈빛은 빛났다. 그의 말에선 그가 자신이 맡은 캐릭터를 아끼고 존중하고 있다는 것이 여실히 느껴졌다. 그가 “이츠학이란 인물 자체가 어떻게 이럴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불쌍하다”고 말하는 것 역시 이츠학에 대한 애정이 없인 할 수 없는 말이었을테니.

# 이츠학, 그를 생각하면
공연이 중반부에 들어가면 헤드윅은 옷을 갈아입기 위해 무대에서 잠시 퇴장한다. 그리고 그 순간 이츠학의 솔로곡이 연주된다. 이글스의 ‘데스페라도(Desperado)’를 비롯, 라디오헤드 ‘크립(Creep)’, 칼라 보노프 ‘더 워터 이즈 와이드(The Water Is Wide)’, 린다 론스태드 ‘롱 롱 타임(Long Long Time)’ 등 다양한 곡들을 공연마다 랜덤으로 한 곡씩 부른다. 곡들은 공통점을 갖고 있다. 바로 쓸쓸함이다.
그 쓸쓸함이 주는 위로는 이츠학 그 자신을 위한 것일까, 헤드윅을 위한 것일까. 질문을 경청하던 제이민은 크게 공감하며 이츠학과 그의 노래를 설명하기 시작했다. 제이민은 ‘데스페라도’에 대해 “원래 좋아하는 곡”이라고 설명하며 환히 웃었다.
“원래 좋아하는 노랜데 무대 위에서 불렀을 때 가사가 굉장히 묘하게 맞아 떨어진단 걸 느꼈어요. 가사 중에 ‘프리덤, 프리덤(Freedom, Freedom)’이라며 자유를 외치는 부분이 있어요. 헛헛한 마음이라고 해야 될까요. 이츠학이 자기의 말로 얘기하는 게 느껴져서 너무 와 닿았죠.”
“제가 생각하는 이츠학은 기본적으로 갖고 있는 감정이 쓸쓸함이에요. 그래서 그 부분을 좀 더 부각시키고 싶었어요. 작품 내내 이츠학이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순간이 없어요. 그렇기 때문에 그런 부분을 더 부각시킬 수 있는 건 솔로 곡을 부르는 때였죠. 그리고 희한하게 굳이 쓸쓸한 곡을 부르겠다 마음먹고 고르지 않아도 제가 부르고 싶은 곡들이 다 이런 부류의 곡들이더라고요. 가사가 이츠학의 상황에 딱딱 맞아떨어졌죠.”
작품의 끝 무렵 ‘미드나잇 라디오(Midnight Radio)’에서 무대를 뛰쳐나간 이츠학이 크리스탈이 돼 돌아와 관객들에게 인사를 하는 장면이 있다. 제이민은 “감격스러운 장면”이라며 설명을 덧붙였다.
“이츠학이 크리스탈로서 처음 인사를 드리는 장면이잖아요. 노래를 부르는데 정말 울음을 꾹 참아요. 암전이 되는 순간 눈물이 터져버려요. 인사를 하고 나가면 관객분들이 격려의 박수를 보내주고 계신 게 느껴져요.”

원래의 제이민은 이츠학의 모습과는 정 반대다. 그렇기에 그 스스로도 이런 남자 역할을 할 수 있을까 생각도 못했다고 한다. 그렇지만 마냥 여성스러운 캐릭터가 편치만도 않던 제이민에게 이츠학은 그 같은 것들을 해소시키는 캐릭터였다. 마치 숨겨왔던 모습을 발견한 것처럼 말이다. ‘헤드윅’과 이츠학을 생각하는 제이민의 표정은 쉬이 읽히지 않았다.
“‘헤드윅’은 제게 너무나 큰 행운이라는 말 밖에 설명이 안 되네요. 저한테 큰 보물 같은 존재로 계속 기억될 것 같아요. 공연이 갖고 있는 타이틀 뿐 아니라 여기서 만난 모든 분들이 저에게 너무 많은 사랑과 도움을 주셨어요. 공연장에 오는 것도 너무 행복하고 즐겁네요.”
3월 초, 약 3달의 공연을 시작한 ‘헤드윅’은 이달 말 다시 한 번 안녕을 고한다. 처음으로 만난 ‘헤드윅’ 그리고 이츠학. 한 달도 채 남지 않은 이츠학과의 이별을 생각하던 제이민은 잠시 깊은 생각에 빠졌다.
“여태까지 함께 해온 이츠학에게 힘들었지만 고생 많았고 잘 했다는 말을 해주고 싶어요. 주마등처럼 순간순간들이 생각나고 이츠학이 짠하게 느껴져요. 정말 열심히 해왔구나 싶기도 하고요. 앞으로 한 달 남짓 함께 할 이츠학에게는 ‘미드나잇 라디오’에서 지지말고 포기말라고 말해주고 싶어요(웃음).”
제이민이 ‘헤드윅’을 통해, 이츠학을 통해 성장을 이뤘다고 감히 말할 수 있지 않을까. 그가 무대에 오르는 모습이 배우일지 가수일지는 모르겠지만 그가 성장을 멈추지 않고 있음을, 그렇기에 그를 응원하는 이들 역시 지치지 않고 그를 지지할 것임을 확신한다. (사진제공: SM엔터테인먼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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