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배우에게 시간이란 무엇일까.
서유정에게 지난 몇 년은 조금 달랐다.
배우라는 이름보다 엄마라는 이름으로 살아야 했던 시간. 촬영장을 그리워할 겨를도 없이 아이의 하루를 돌보고, 밤이면 지쳐 잠들던 날들이었다.
그렇게 시간이 흘렀다. 그리고 다시 카메라 앞에 섰을 때, 서유정은 이전과는 다른 감정을 가진 배우가 되어 있었다.
연기를 잊은 것은 아니었다. 삶이 그에게 새로운 감정을 가르쳐주고 있었을 뿐이다.
역사적 배경을 바탕으로 한 허구의 이야기였지만, 서유정은 그 시대가 품고 있는 아픔을 가볍게 표현하고 싶지 않았다. 일본과의 전쟁, 나라를 지키려 했던 사람들의 고통을 온전히 경험할 수 없기에 더욱 조심스러웠다.
주막에서는 주모의 얼굴을, 의병으로서는 나라를 위해 싸우는 사람의 눈빛을 보여줘야 했다. 하나의 인물 안에 존재하는 서로 다른 모습을 표현하는 일이 쉽지 않았다.
무엇보다 뛰어난 배우들이 함께한 대작이었다. 작품에 누가 되고 싶지 않다는 마음은 그를 더욱 집중하게 만들었다.
지금도 잊히지 않는 장면이 있다.
마지막 촬영인 만큼 현장에는 많은 출연진이 함께했다. 육체적인 어려움뿐 아니라 인물의 마지막을 받아들여야 하는 마음의 무게도 컸다.
그때 서유정에게 힘이 되어준 것은 현장의 사람들이었다. 스태프들은 어려운 장면을 조금이라도 편하게 마칠 수 있도록 세심하게 배려했다.
그는 작품이 끝난 뒤에도 동료들과 단체 대화방을 통해 인연을 이어갔다. 행사나 시사회에서 다시 만날 기회도 있었지만, 아이를 돌보느라 함께하지 못한 때가 많았다.
시간이 흘러도 촬영장의 기억은 따뜻하게 남아 있었다. ‘미스터 션샤인’ 이후 약 4년 반 만에 다시 만난 작품은 ‘붉은 단심’이었다.
당시 서유정은 송도에서 어린 딸을 키우고 있었다. 어린이집에 다니는 아이를 돌보면서 촬영까지 병행하는 일은 생각보다 훨씬 어려웠다.
촬영장까지 왕복 일곱 시간이 걸리는 날도 있었다. 사극 특성상 이동이 잦았고, 아이를 맡기는 문제도 늘 마음에 걸렸다.
주변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작품을 마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시간에는 걱정만 있었던 것이 아니다.
오랜만에 촬영장으로 향하는 설렘, 다시 일을 한다는 행복, 새로운 인물을 만나는 호기심도 함께했다.
그는 그 감정들을 안고 작품을 끝냈다. 이후에도 배우로서의 시간이 빠르게 이어지지는 않았다.
코로나 시기에 아이를 낳았고, 아는 사람이 많지 않은 송도에서 홀로 육아에 매달렸다. 낮에는 아이를 돌보고 밤이면 지쳐 잠들었다. TV를 볼 여유조차 없었고, 다음 작품을 기다릴 겨를도 없었다.
서유정은 그 시절을 돌아보며 자신을 잃고 살았던 것 같다고 했다. 그 말에는 배우로서의 아쉬움만 담겨 있지 않았다.
한 아이의 엄마로 살아가기 위해 자신의 시간을 뒤로 미뤄야 했던 사람의 현실이 있었다.
그렇게 다시 몇 년이 흘렀다.
딸 송이가 초등학생이 되었을 무렵, 서유정은 더 이상 연기를 미루고 싶지 않았다. 배우로서의 감각을 잃고 싶지 않았고, 변화하는 시대에 맞춰 자신의 연기도 다시 움직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때 만난 작품이 ‘욕망의 덫’이었다.
우정출연이라는 형식은 오랜만에 복귀하는 그에게 부담을 덜어주었다. 다시 연기 감각을 찾을 수 있는 좋은 기회이기도 했다.
무엇보다 박희정이라는 인물이 마음에 들었다. 열심히 살아가는 엄마였고, 짧은 등장에도 분명한 존재감을 남길 수 있는 역할이었다.
장서희와 함께 연기할 수 있다는 점도 출연을 결심한 중요한 이유였다.
박희정을 연기하면서 서유정은 이전과 다른 경험을 했다. 아이를 지키려는 엄마의 마음을 더 이상 상상만으로 이해할 필요가 없었다.
기다림과 애틋함, 집착과 헌신, 때로는 자식의 미래를 위해 자신의 양심과 갈등해야 하는 감정까지. 엄마가 된 뒤 일상에서 마주했던 마음들이 박희정의 감정과 맞닿아 있었다.
눈빛과 표정, 작은 행동 하나까지 이전보다 자연스럽게 표현할 수 있었다. 배우로서 잠시 멀어졌다고 생각했던 시간이 오히려 인물을 이해하는 힘이 되어 돌아온 것이다.

장서희와의 첫 촬영도 특별하게 남아 있다.
카페에서 마주하는 두 장면 모두 감정의 밀도가 높은 장면이었다. 어려운 장면부터 촬영해야 한다는 사실에 걱정이 앞섰지만, 현장에서 대사를 맞춰보자 그 마음은 사라졌다.
처음 호흡을 맞추는 배우라는 사실이 무색할 만큼 자연스럽게 감정이 이어졌다. 서유정은 장서희의 연기 내공 덕분에 자신도 편하게 연기할 수 있었다고 돌아봤다.
장서희는 촬영 이후에도 서유정의 장면을 모니터하고 연락을 보내왔다. 극의 흐름을 잘 잡아주어 좋았다는 칭찬이었다. 오랜만에 돌아온 배우에게 그 말은 큰 힘이 됐다.
현장의 배려도 잊을 수 없었다.
34도에 이르는 무더위 속에서 야외 촬영이 이어졌다. 누군가는 물을 건넸고, 누군가는 선풍기를 가져왔다. 머리카락이 흐트러지지 않도록 바람을 조절해주고, 잠시라도 편히 쉴 수 있도록 의자를 챙겨주었다.
모두가 더운 현장이었지만 서로를 먼저 생각했다. 서유정은 그 작은 배려들이 모여 촬영장을 행복한 공간으로 만들어주었다고 기억했다.
짧은 출연이었지만 시청자들의 반응도 남달랐다.
오랜만에 그의 연기를 본 사람들은 여전한 모습이 반갑다며 더 오래 보고 싶다는 아쉬움을 전했다. 극 중 박희정이 죽음을 맞는 장면을 두고 다시 살아 돌아와야 한다는 농담 섞인 반응도 있었다.
서유정 역시 이번 작품을 통해 전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배우 서유정이 여전히 연기할 수 있다는 것. 그 마음은 단순히 예전의 모습을 증명하고 싶다는 뜻만은 아니었다.
엄마가 된 지금, 이전에는 몰랐던 감정들을 표현할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싶었다.
그에게 다시 연기한다는 것은 지나간 시간을 되찾는 일이 아니다. 그 시간을 품고 새로운 인물에게 다가가는 일이다.
앞으로 기회가 된다면 ‘미스터 션샤인’과 같은 사극에도 다시 도전하고 싶다고 했다. ‘유나의 거리’처럼 자신이 가진 에너지와 열정을 마음껏 쏟아낼 수 있는 작품도 기다리고 있다.
어떤 역할이든 자신이 해낼 수 있다면 더 큰 욕심과 열정으로 부딪히고 싶다는 마음이다.
배우에게 공백은 때로 두려운 시간이다.
하지만 서유정의 이야기를 듣고 나면 조금 다른 생각이 든다. 카메라 앞에 서지 않았던 날에도 그는 수많은 감정을 배우고 있었다.
아이를 기다리는 마음, 지키고 싶은 마음, 자신보다 누군가를 먼저 생각하는 마음. 그 모든 시간이 쌓여 지금의 서유정을 만들었다.
‘미스터 션샤인’의 홍파가 시대의 아픔을 견디며 자신의 자리를 지켰다면, ‘욕망의 덫’의 박희정은 엄마가 된 서유정이 살아온 시간으로 완성한 인물이었다.
이제 서유정은 다시 카메라 앞에 서고 싶다. 지나간 시간을 설명하기보다, 앞으로 만날 인물들로 자신의 이야기를 이어가고 싶다.
그가 살아온 시간은 이미 다음 연기를 준비하고 있었다.
김민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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