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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화가 김현정이 그린 한국의 초상⑯] 붉은 고무장갑이 족두리와 함께인 이유

김연수 기자
2026-05-29 10:3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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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화가 김현정이 그린 한국의 초상⑯] 붉은 고무장갑이 족두리와 함께인 이유 (김현정, <결혼: 아침을 여는 샘>, 177x121cm, 한지 위에 수묵과 담채, 콜라쥬, 2020. / 출처: 김현정 아트센터)

한국 사회에서 “밥 먹었어?”라는 말은 단순한 인사가 아니다. 그것은 애정의 표현이고, 관계를 확인하는 방식이며, 누군가를 제대로 돌보고 있는지를 묻는 생활의 언어다. 그중에서도 유독 특별하게 여겨지는 것이 아침밥이다. “아침은 꼭 먹어야 한다”, “남편 출근 전에 밥은 차려야지”, “아이 밥은 먹였어?” 같은 말 속에는 단순한 식습관 이상의 감정이 들어 있다. 한국에서 아침은 사랑이고 성실함이며 책임감이다. 누군가의 하루를 먼저 열어 주는 행위에 가깝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다정한 풍경은 너무 자주 한 사람의 반복된 노동 위에 세워진다. 따뜻한 식탁은 쉽게 미담이 되지만, 그 식탁을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시간과 체력은 당연한 역할처럼 소비된다. 사랑이라는 이름 아래 생활의 무게가 조용히 쌓여 간다. 결혼은 두 사람의 이야기로 시작되지만, 현실 속 생활은 종종 한 사람의 손끝으로 기울어진다.

〈결혼: 아침을 여는 샘〉은 그런 장면에서 출발한 작품이다. 앵그르의 명화 〈샘〉을 바라보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만약 오늘날 한국의 결혼 생활 속에서 다시 태어난다면, 그 샘에서는 무엇이 흘러나오게 될까.

그래서 화면 속 여인은 더 이상 맑은 물을 들고 있지 않다. 화려한 족두리를 쓴 채 한 손에는 시리얼 박스를 들고 있고, 붉은 고무장갑을 낀 손끝에서는 우유와 시리얼이 폭포처럼 쏟아진다. 바닥에는 서울우유 팩이 놓여 있고, 신부의 단아한 한복 아래로는 생활의 기척이 배어 나온다. 가장 화려한 혼례의 이미지와 가장 현실적인 아침 풍경이 한 화면 안에서 충돌한다.

이 장면은 우습지만 화려하고, 낯선 것 같으면서 익숙하다. 결혼 이후 여성은 더 이상 감상의 대상이 아니라 생활의 중심으로 들어간다. 누군가의 출근 시간과 식사, 냉장고와 장보기, 아이의 하루와 가족의 리듬을 함께 관리하는 사람. 한국 사회에서 “좋은 아내”, “생활력 있는 사람”이라는 말은 돌봄과 희생이라는 단어와 붙어 다닌다. 그리고 그 반복은 사랑이라는 이름 덕분에 쉽게 보이지 않는다.

작품 속 시리얼은 단순한 음식이 아니다. 끝없이 반복되는 아침의 시간이고, 매일 흘려보내는 돌봄의 에너지다. 풍요처럼 보이지만 동시에 소진처럼 보인다. 계속 흘러넘치는데도 정작 그 흐름을 만드는 사람은 조용하다. 어쩌면 한국 사회의 돌봄은 늘 이런 방식으로 유지되어 왔는지도 모른다. 누군가는 새벽처럼 먼저 깨어 있고, 누군가는 그 위에서 하루를 시작한다.

붉은 고무장갑은 그래서 중요하다. 족두리와 함께 놓인 순간, 결혼의 환상은 생활의 현실과 맞닿는다. 사랑은 낭만적인 감정이지만, 결혼은 결국 생활이라는 사실. 그리고 생활은 반복으로 이루어진다는 사실. 화면 속 여인은 특별히 슬퍼 보이지도, 화가 나 보이지도 않는다. 오히려 담담하다. 그래서 더 현실적이다. 한국의 많은 여성들이 실제로 그렇듯이.

이 작품은 결혼을 비관적으로 바라보려는 그림은 아니다. 오히려 사랑이 어떻게 생활이 되는지를 바라보는 작업에 가깝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결국 그의 하루를 함께 책임지는 일이기도 하다. 다만 그 책임이 너무 오래 한 방향으로만 흐를 때, 사랑은 돌봄이 되고, 돌봄은 노동이 되며, 노동은 어느 순간 존재의 역할처럼 굳어져 버린다.

생각해 보면 한국인은 유난히 아침을 중요하게 여긴다. 하루를 시작하는 첫 끼라서만은 아닐 것이다. 아침에는 이상하게 한 사람의 마음이 드러난다. 피곤한 몸을 일으켜 누군가의 밥을 짓는 마음, 식탁 위에 반찬 하나라도 더 올려두는 마음, 바쁜 출근길에도 “밥은 먹고 가”라고 말하는 마음. 한국의 사랑은 어쩌면 아주 거창한 언어보다 그런 생활 속 문장들로 이어져 왔다.

하지만 사랑은 왜 이렇게 자주 누군가의 노동이 되는가. 그리고 우리는 언제부터 돌봄을 당연함의 형태로 받아들이게 되었을까. 우유와 시리얼이 끝없이 흘러내리는 이 장면 앞에서, 결국 남는 것은 그런 질문들이다. 〈결혼: 아침을 여는 샘〉은 그 답을 단정하지 않는다. 다만 오늘도 누군가의 하루를 먼저 열어 주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의 시간을, 조용히 화면 위로 흘려보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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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화가 김현정이 그린 한국의 초상⑯] 붉은 고무장갑이 족두리와 함께인 이유 (출처: 김현정 아트센터)


한국화가 김현정은 선화예중·예고와 서울대학교 동양화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현대 한국인의 삶과 감정을 유머와 풍자로 풀어낸 21세기 풍속도 〈내숭 시리즈〉로 널리 알려졌으며, 이를 통해 한국 사회의 모습을 ‘한국의 초상’이라는 시선으로 그려 왔다. EBS <해요와 해요> ‘댕기언니’로 활동했으며 서울시와 희망브릿지 홍보대사를 맡고 있다. 30만 팔로워와 소통하며 국내외 전시와 강연을 통해 한국화의 새로운 가능성을 모색하고 있다.

글_김현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