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배우로 성공한 후배가 자신을 ‘모델 출신’이라고 소개하기 어려워하던 때가 있었다. 양의식은 그 모습이 마음에 남았다고 했다. 더 큰 무대로 나아간 일은 반가웠지만, 처음 꿈을 키운 직업까지 감춰야 할 이유는 없었다.
2006년 문을 연 시상식은 모델들의 노력과 성과를 함께 축하하는 자리였다. 모델들이 선정한 가수와 연기자에게도 상을 드렸다. 같은 대중문화예술인으로서 서로의 일을 인정하고 응원하자는 뜻이었다. 처음부터 거대한 국제행사를 그렸던 것은 아니다. 출발점은 모델 한 사람의 자긍심이었다.
그런데 다른 나라의 모델들을 만나면서 질문이 하나 더 생겼다. 재능 있는 청년들이 무대에 설 기회조차 얻지 못한다면, 그 길은 누가 열어줄까.
한국과 중국, 일본을 중심으로 교류가 늘면서 각국의 사정이 보이기 시작했다. 열정은 있어도 배울 곳이나 자신을 알릴 무대가 부족한 청년들이 있었다. 해외에서 활동하고 싶어도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알기 어려웠다. 나라와 언어는 달라도, 기회를 기다리는 마음은 같았다.
양의식은 각국의 모델과 관계자를 만나며 그 통로를 넓혀갔다. 성취를 축하하던 시상식에 신인을 발견하는 과정이 더해지고, 패션과 뷰티 분야의 사람들이 함께 작업하는 자리가 생겼다. 모델들의 축제는 그렇게 조금씩 아시아의 만남으로 커졌다.
각국에서 만난 전통복식과 공예, 유적은 그런 생각을 더 단단하게 했다. 경제 규모만으로는 알 수 없는 문화의 깊이가 있었다. 모델의 옷차림과 몸짓에도 그가 자라온 곳의 감각이 담겼다. 한 사람을 제대로 소개하려면 그 배경에도 관심을 가져야 했다.

그 생각을 또렷하게 확인한 순간은 뜻밖에도 함께 모일 수 없었던 2020년에 찾아왔다. 코로나19로 대면 행사가 어려워지자 비대면 대회를 진행했다. 무대가 사라질 위기에서 찾은 방법이었지만, 화면에는 이전과 다른 풍경이 펼쳐졌다.
투바 참가자는 자신이 사는 지역의 자연과 전통복식, 음악을 영상에 담았다. 낯선 지역의 이름이 한 사람의 모습과 함께 구체적인 풍경으로 다가왔다. 참가자는 카메라 앞에 서는 데 그치지 않고, 자기 고장의 무엇을 보여줄지 직접 골랐다.
그가 말하는 ‘아시아 모델로드’도 어렵게 풀 필요는 없다. 모델의 만남을 통해 사람과 문화, 일이 오가는 길이다. 한국의 모델과 패션·뷰티 분야가 아시아의 새로운 파트너를 만나고, 다른 나라의 인재도 한국에서 기회를 얻는다. 한 번의 초대가 다음 작업으로 이어질 때 그 길은 더 넓어진다.
축제의 프로그램을 들여다보면 그 흐름이 보인다. ‘페이스 오브 아시아’는 각국에서 선발된 신인들이 가능성을 보여주는 자리다. 서로 경쟁하지만, 가까이에서 준비하는 동안 동료의 장점도 배우게 된다. 다른 언어를 쓰는 참가자가 함께 무대를 준비하는 동료가 되는 시간이다.
‘아시아오픈컬렉션’에서는 모델과 디자이너, 헤어·메이크업 아티스트가 한 작품을 완성한다. 관객이 보는 것은 짧은 무대지만, 그 뒤에는 여러 사람의 해석과 손길이 있다. 양의식이 준비 과정에도 주목한 이유다. 모델뿐 아니라 함께 무대를 만드는 사람들의 전문성도 드러나야 한다고 봤다.
‘아시아모델어워즈’는 그렇게 쌓인 활동과 성취를 조명한다. 신인이 기회를 얻고, 현장에서 경험을 쌓고, 성장한 모습으로 다시 후배에게 자극을 주는 흐름이다. 세 프로그램을 잇는 것은 결국 사람의 성장이다.
여러 나라의 사람이 함께하는 만큼, 존중은 말보다 세심한 준비에서 드러났다. 종교와 식습관에 맞춰 식단을 마련하고 기도 시간을 고려해 일정을 조정했다. 멋진 무대에 초대하는 것과 그곳에서 편안하게 지낼 수 있도록 돕는 일은 함께 가야 했다.
양의식은 무대에서 다른 나라의 문화를 반갑게 즐기는 마음이 일상으로도 이어지기를 바랐다. 우리 곁에서 살아가는 다양한 배경의 이웃을 바라보는 시선도 다르지 않아야 한다는 생각이다. 서로 다른 출발을 한 모델들이 자기 능력으로 인정받는 장면을 더 많이 보여주고 싶다고 했다.

이 많은 만남을 오래 이어온 힘으로 그는 신뢰를 꼽았다. 해마다 행사 여건이 달라지고 국가별 사정도 바뀌지만, 어려울 때 함께 움직여주는 관계는 하루아침에 생기지 않는다. 직접 현지를 찾아 만나고, 가능한 한 그 나라 말로 인사하며 상대의 문화를 이해하려 했다.
2020년 비대면 대회 역시 그 관계를 놓지 않으려는 선택이었다. 모일 수 없다는 이유로 청년들이 기다려온 기회까지 사라지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형식이 달라져도 서로를 만나고 활동을 알리는 약속은 이어가야 했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2026년 제21회를 맞는 아시아모델페스티벌은 27개국에서 대표 모델을 선발해온 네트워크를 갖췄다. 그러나 지금 그가 중요하게 보는 것은 숫자 다음의 이야기다. 무대에 섰던 참가자가 돌아간 뒤 무엇을 할 수 있는지, 그곳에서 만난 사람과 다시 일할 수 있는지가 더 중요하다.
보람을 느끼는 소식도 행사장 밖에서 들려온다. 참가자들이 귀국 후 활동을 이어가고, 한국과 새로운 교류를 만들어간다는 이야기다. 축제가 끝나도 만남은 끝나지 않았다는 뜻이다. 박수는 멎었지만 함께 일할 사람과 다음에 도전할 이유가 남아 있는 셈이다.
처음에는 모델들이 당당히 돌아올 고향을 만들고 싶었다. 그 마음이 국경을 건너면서, 서로 다른 곳에서 출발한 청년들이 함께 설 무대가 됐다. 양의식이 바라는 축제의 다음 장면은 바로 그 청년들의 일상에 있다. 한국에서 함께 선 시간이 각자의 나라에서 새로운 시작이 되는 것. 그때 비로소 한 번의 축제는 오래 이어지는 기회가 된다.
김민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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