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연극 ‘베이컨’이 런던 핀버러 극장에서 시작해 오프브로드웨이와 LA 매트릭스 극장을 거쳐 아시아 초연으로 한국을 찾았다. 두 소년의 위태로운 관계와 성장통을 단 두 인물로 밀도 높게 그려낸 ‘베이컨’은 6월 17일부터 9월 7일까지 예스24스테이지 3관에서 국내 초연 중이다.
‘베이컨’은 거대한 시소 하나만 놓인 무대 위, 감정을 숨긴 채 살아가는 소년 ‘마크’와 분노와 충동으로 자신을 표현하는 ‘대런’이 오르내리는 감정과 권력의 기울기를 통해 청소년기의 불안과 사회적 억압을 날카롭게 보여준다. ‘마크’역에는 이휘종, 조성태, 김성현, ‘대런’역에는 이서준, 김방언, 신재휘가 무대에 오른다.
bnt는 이휘종과의 인터뷰를 통해 연극 ‘베이컨’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봤다.
Q.2022년 런던 초연에 이어 아시아 최초, 한국 초연인 연극 ‘베이컨’에 참여한 소감은 어떤가요? 한국 관객들에게는 어떻게 공연이 비춰줬으면 하나요?
“제 연기에서 늘 부족한 점이 뭘까 고민하다 보면, 그 끝에는 늘 ‘섬세함’이라는 단어가 있었어요. 그래서 ‘베이컨’처럼 디테일 중심의 연극에 참여하게 된 건 저한테도 도전이자 성장의 기회였죠.
이 작품은 계급, 차별과 편견, 사회적 타자화, 남성성의 폭력성, 그리고 청소년기의 정체성과 성장 같은 굵직한 주제들을 다루고 있어요. 물론 이런 무거운 주제를 한국에서 전부 드러내기엔 한계가 있겠지만, 그래도 영국 공연에서 말하고자 했던 방향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으려 노력했어요.

Q.‘베이컨’에서 ‘대런’, ‘마크’는 전혀 다른 배경과 성향을 가진 인물인데, 이를 표현하기 위해 가장 신경 쓴 부분은 무엇인가요?
“처음엔 마크라는 인물을 어쩌면 남들은 좀 이해하기 어려운 '이상한 캐릭터'라는 정형화된 틀에서 접근했어요. 사회에서 비주류로 여겨지는 인물들을 다룬 영화나 애니메이션을 참고해서 캐릭터를 만들어나가기 시작했죠. 그런데 매튜 연출님, 전서연 연출님과 함께 작업하면서 마크가 단순히 ‘이질적인 존재’가 아니라는 걸 알게 됐어요. 오히려 사고방식이 굉장히 직선적이고, 호기심이 많은 인물이더라고요.
그래서 마크를 ‘주눅 들고 인식이 느린’ 인물로 보기보다는, 상황을 자기 방식대로 받아들이고 바로바로 반응하는 능동적인 인물로 해석하게 됐어요. 특히 대런과 처음 만나는 장면에서도 마크는 나름대로 상황을 분석하거나 리드하려는 움직임이 있어서, 그 심리를 섬세하게 분석하고 표현하는 데 집중했어요. 그리고 대런이라는 친구를 만나고 나서, ‘사랑’이라는 키워드가 마크에게 얼마나 큰 영향을 미쳤는지를 특히 신경 써서 표현하려 했어요.”
Q.영국 연출가 매튜 아일리프가 내한해서 함께 작품을 만들었는데, 연출가와는 어떤 이야기를 많이 나눴나요?
그리고 감정이 표현되는 방식도 ‘마크와 대런은 감정을 잘 숨기고 표현하지 못하는 인물’이라는 전제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울지 않는 것’보단 ‘왜 감정을 숨기려 하는가’를 분석하는 데 더 집중하게 됐죠.
또 연출님이 강조하셨던 게 ‘알지만 모르는 척’, ‘모르지만 아는 척’, ‘진짜 모르는 것’ 이 세 가지 상태였어요. 이걸 생각하면서 연기하는 과정이 굉장히 흥미로웠고요.
게다가 연기를 디렉션할 때 “블루, 블루, 레드”나 “블루, 레드, 레드”처럼 말씀하시는데, 글로 보면 엄청 추상적인 말이지만, 정작 현장에서 들었을 땐 이상하게 훨씬 더 잘 와닿더라고요.”

Q.공연 중 가장 좋아하는 장면을 꼽자면요?
“가장 좋아하는 장면은 단연 엔딩이에요. 마크가 엉킨 줄을 하나하나 풀어보려 하기보다는, 스스로 판단해서 줄을 ‘끊어낸다’는 점에서 더 큰 의미가 있다고 느꼈거든요.
이 장면에서 마크는 단순히 감정적으로 반응하는 게 아니라, 관계의 끝을 명확하게 인식하고 그에 따른 행동을 ‘직접’ 선택하잖아요. 그래서 마지막 대사를 할 때마다 늘 쉽진 않지만, 그만큼 묘한 쾌감도 있는 것 같아요.”
Q.‘마크’에게 ‘대런’은 어떤 사람인가요? 혹은 각 캐스팅의 ‘대런’마다 다르게 느껴지나요?
“기차는 혼자선 움직일 수 없잖아요. 철로가 있어야 나아갈 수 있고, 어디로 가야 할지도 알게 되니까요.
마크와 대런도 그랬던 것 같아요. 처음엔 한 명은 기차였고, 다른 한 명은 철로였는데, 우연히 만나 같이 달리기 시작한 거죠. 서로를 통해 처음으로 ‘무언가가 움직이는’ 감정을 경험했고, 그 길 위에서 자신이 어디로 가고 싶은지도 조금씩 알게 된 것 같아요.
하지만 감정이 앞서고, 서로의 방향이 달라서 결국은 철로를 이탈하게 됐고요. 그리고 시간이 지나 다시 마주했을 땐, 예전처럼 같은 길을 달릴 순 없다는 걸 누군가는 알고 있었어요. 마음은 여전했지만, 이제는 각자의 길을 가야 한다는 걸 깨달은 거죠.
저는 이게 마크와 대런의 관계라고 생각해요. 함께였기에 움직일 수 있었고, 함께였기에 멀어질 수밖에 없었던 관계.
그리고 세 배우가 표현하는 대런이 다 달라요. 이서준 배우의 대런은 감정이 크고, 정체성이나 가족 문제 같은 복잡한 배경이 잘 드러나는 대런이에요. 김방언 배우는 마크를 정말 사랑하고, 또 사랑받고 싶어하는 마음이 제일 크게 느껴져요. 신재휘 배우는 셋 중에서 제일 친구 같은 대런인 것 같아요. 애매하고 불안정한 감정 사이에서 잘 버티고, 그 경계에서 자연스럽게 움직이는 모습이 인상적이에요.”
Q.서준 씨랑 휘종 씨는 한예종 동기인데 15년을 봐온 친구랑 2인극으로 호흡을 맞추는 건 어땠나요?
“연습 시작부터 이서준 배우가 있어서 너무 편했어요. 서준이랑은 입학 때부터 벌써 15년을 알고 지냈고, 과대표도 하고, 연기 잘하기로도 유명했던 친구라서 같이 무대에서 연기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했어요. 무대 위에서도 뭔가 둘 사이의 케미스트리가 있는 것 같아요. 서로를 제일 잘 알고, 믿고, 무대 위에서 호흡을 들으며 반응하려고 하는 그 느낌이 제 몸 밖에서 지켜보이는 순간이 있거든요. 마크 대사처럼 말하자면, 왠지 모르게 흥분되고 흐뭇해지는 그런 순간들이요.”
Q.제목 ‘베이컨’은 영국에선 흔한 음식이고, 극 중 ‘베이컨롤’은 두 사람이 친구가 되는 중요한 매개잖아요. 이 제목을 어떻게 해석하셨나요? 그리고 본인에게 ‘베이컨롤’ 같은 음식이 있다면요?
“‘베이컨’이라는 제목은 단순한 음식이 아니라, 관계의 전환점을 상징하는 것처럼 느껴졌어요. 마크와 대런의 대화 안에서 ‘베이컨’이라는 단어는 관계의 시작과 끝을 동시에 보여주는 것 같았고요.
팀 내에서는 또 이런 해석도 나왔어요. “베이컨은 철판 위에 올리기 전엔 스트레이트(곧은)하지만, 익으면 벤트(구부러진다)”는 식으로요.
개인적으로 베이컨 같은 음식을 꼽자면 고등학교 때 매점에서 친구들과 자주 먹었던 ‘피자빵’이 떠올라요. (국밥이나 떡볶이를 떠올리는 분들도 많은데, 전 중학생 땐 그런 음식 별로 안 좋아했거든요.)”

Q.학창시절엔 어떤 학생이었나요? 10대 시절을 대표할 에피소드가 있다면요?
“전 미래를 크게 걱정하지 않고 살았던 것 같아요.
그래서 친구들이 대학 준비할 때도 별 고민이 없었고, 그러다 문과/이과가 갈리는 시점에 뭔가는 해야겠다 싶어서 부모님 권유로 연기를 시작했죠.
제 10대를 대표할 에피소드를 꼽자면, 고3 때 예체능 반에서 반 2등을 했던 기억이 나요. 대학을 꼭 가야겠다는 마음으로 열심히 공부했던 시절이었죠.”
Q.올 한 해 남은 시간은 어떻게 보내고 싶으세요?
“전 원래 장기 계획을 세우는 스타일은 아니에요. (ISTP 인간답게요…) 대신 단기적인 목표는 확실하게 세우고, 그걸 실현하는 데 집중하는 편이에요.
올해도 가능하다면 좋은 작품 속에서 꾸준히 무대에 서고 싶고요. 여름이니까 바다에서 수영도 한 번쯤은 꼭 하고 싶어요.
지금까지는 빠른 속도의 삶을 추구해왔다면, 남은 2025년은 좀 더 ‘슬로우 라이프’를 즐기면서 배우로서의 삶과 인간 이휘종의 균형을 잘 맞춰가고 싶어요.
요즘 배우고 싶은 것도 많고, 이루고 싶은 것도 많은데요. 예를 들면, 목공(작년에 못 배워서 아쉬운), 독서(2023년 이후로 멀어진 친구처럼 된), 언어 공부(항상 배우고 싶지만 겁이 나서 시작도 못한), 건강(허리디스크! 2년째 안 터지고 있음) 같은 것들이요. 이렇게 인터뷰에 남기면 좀 더 잘 지킬 수 있지 않을까요?”
위수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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