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terview

‘베이컨’ 이서준 “이 역할 아니었다면 다시 설 용기 없었을 것” [인터뷰]

위수정 기자
2025-07-30 11:0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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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컨’ 이서준 “이 역할 아니었다면 다시 설 용기 없었을 것” [인터뷰](사진 제공:달컴퍼니)


연극 ‘베이컨’이 런던 핀버러 극장에서 시작해 오프브로드웨이와 LA 매트릭스 극장을 거쳐 아시아 초연으로 한국을 찾았다. 두 소년의 위태로운 관계와 성장통을 단 두 인물로 밀도 높게 그려낸 ‘베이컨’은 6월 17일부터 9월 7일까지 예스24스테이지 3관에서 국내 초연 중이다.

‘베이컨’은 거대한 시소 하나만 놓인 무대 위, 감정을 숨긴 채 살아가는 소년 ‘마크’와 분노와 충동으로 자신을 표현하는 ‘대런’이 오르내리는 감정과 권력의 기울기를 통해 청소년기의 불안과 사회적 억압을 날카롭게 보여준다. ‘마크’역에는 이휘종, 조성태, 김성현, ‘대런’역에는 이서준, 김방언, 신재휘가 무대에 오른다.

배우 이서준이 9년 만에 연극 무대에 섰다. 드라마 ‘악연’, ‘슬기로운 의사생활’, 영화 ‘한산 : 용의 출현’ ‘사냥의 시간’ 등으로 대중에게 얼굴을 알려온 그는 연극 ‘베이컨’을 통해 다시 한번 무대라는 본질적인 공간으로 돌아왔다. 처음 대본을 읽었을 때 4시간 동안 자리를 뜨지 못할 만큼 강렬한 여운을 느꼈다는 그는, ‘이건 내 역할이다’라는 확신과 함께 ‘대런’이란 인물로 무대에 올랐다.

bnt는 이서준과의 인터뷰를 통해 연극 ‘베이컨’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봤다. 

Q.2022년 런던 초연에 이어 아시아 최초, 한국 초연인 연극 ‘베이컨’에 참여한 소감은 어떤가요? 한국 관객들에게는 어떻게 공연이 비춰줬으면 하나요?

“처음 대본을 읽었을 때 ‘내가 방금 뭘 본 거지?’라는 생각이 들 만큼 큰 충격을 받았어요. 그 여운이 너무 강해서, 한자리에 앉아 4시간 동안 대본을 네 번이나 정독했거든요. 한 번은 작가의 입장에서 ‘이 작품은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가’를 고민했고, 또 한 번은 대런의 시선에서, 그다음은 마크의 시선에서, 마지막으로는 이 이야기를 무대 위 시소에서 어떻게 구현할 수 있을지를 상상하면서 읽었죠. 그렇게 여러 관점에서 들여다보니까 단순해 보였던 장면들이 점점 복잡하고 깊은 감정으로 다가왔고, 처음 느꼈던 충격이 점점 환희로 바뀌는 순간이 아직도 생생해요.

‘베이컨’이라는 작품은 제목처럼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아주 일상적인 감정과 소재를 다루고 있어요. 누구나 한 번쯤 겪었을 17살의 불완전하고 혼란스러웠던 시기를 정말 정직하게 담고 있고요. 그래서 이 연극은 누군가의 특별한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 모두의 이야기’라고 느껴졌어요.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을 들여다보면 선과 악, 옳고 그름으로 나눌 수 없는 수많은 감정과 상황들이 있잖아요. 이 연극은 그런 복잡한 현실의 결을 담담하면서도 날카롭게 건드리는 작품이에요. 겉으로 보이는 가해와 피해의 구도를 넘어서, 그게 만들어지게 된 사회적 맥락과 구조, 문화를 다시 바라보게 해주는 작품이라고 생각해요.

그리고 이 이야기가 연극이라는 형식으로 무대에서 살아 숨 쉰다는 것, 그게 정말 중요하게 느껴졌어요. 단순히 스크린으로 보는 게 아니라, 배우가 무대 위에서 관객과 직접 호흡하면서 이야기를 전하는 방식이잖아요. 연극 첫 장면에서 마크가 “이건 내 이야기야”라고 말하는데, 정말 그 말처럼 이 작품은 ‘타인의 이야기’가 아니라, 관객 한 사람 한 사람의 이야기처럼 공감되기를 바랐어요. 공연이 끝나고 나면 서로의 생각을 나누고, 삶에 대해서 이야기할 수 있는 그런 깊은 여운이 남는 시간이 되면 좋겠다는 마음이에요.”

Q.드라마, 영화를 하다가 굉장히 오랜만에 연극 무대에 섰는데 감회는요?

“이번 무대는 제게 정말 큰 도전이었고, 동시에 엄청난 용기가 필요했던 일이었어요. 무대 위에서의 연기가 늘 매력적으로 느껴졌고, 졸업 후에도 극단에 들어가 연극 작업을 했었거든요. 자연스럽게 매체 작업이 많아진 와중에도 무대에 대한 갈망은 늘 마음속에 자리하고 있었어요. 그러다 ‘베이컨’ 대본을 만나게 됐고, 읽는 순간 ‘이건 무조건 해야겠다’는 확신이 들었죠. 인생에서 몇 번 있을까 말까 한, 그런 강한 직감이었어요. “이건 내 역할이다”라는 생각이 머릿속에 확 꽂혔고, 바로 하고 싶다고 말씀드렸어요.

그런데 막상 결정을 내리고 나니까 ‘내가 이걸 잘 해낼 수 있을까?’라는 두려움이 밀려오기 시작했어요. 특히, 저라는 배우를 믿고 85분이라는 시간을 내어줄 관객이 과연 있을까, 그런 걱정이 컸어요. 그런데 바로 그 지점에서 제가 맡은 대런이라는 인물과 감정적으로 맞닿게 됐던 것 같아요.

극 중에서 대런이 마크에게 이야기하자며 “5분만 시간을 달라”고 하거든요. 그 절실한 말 한마디가, 9년 만에 무대에 다시 서는 제 마음과 겹쳐 보였어요. “제 이야기를 들어주세요”라고 조심스럽게 말을 거는 그 마음이요. 그렇게 대런의 간절함, 사랑하는 사람에게 다가가고 싶어 하는 용기, 누군가를 향한 애정이 자연스럽게 제 안에 들어오기 시작했어요. 되돌아보면 그 모든 두려움과 고민을 이겨낼 수 있었던 건 결국 ‘대런’ 덕분이었어요. 이 역할이 아니었다면 아마 다시 무대에 설 용기를 쉽게 내지 못했을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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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베이컨’에서 ‘대런’, ‘마크’는 전혀 다른 배경과 성향을 가진 인물인데, 이를 표현하기 위해 가장 신경 쓴 부분은 무엇인가요?

“처음엔 대런의 행동들이 쉽게 이해되지 않았어요. 그래서 대본에 직접적으로 드러나지 않은, 대런을 둘러싼 환경과 배경을 파악하는 데 집중했죠. 엄마의 죽음, 아버지의 폭력과 학대, 친구들과의 관계 같은 과거들을 구체적으로 상상하면서 매튜 연출님과도 많은 이야기를 나눴어요.

그 과정에서 가장 크게 와닿았던 키워드는 ‘외로움’이었어요. 대런은 자신을 진심으로 사랑해줬던 엄마를 잃고, 가정과 학교에서도 철저히 고립된 채 살아가고 있었을 거예요. 누구에게도 이해받지 못하고, 또 그렇게 되지도 않을 거란 감정이 결국 ‘세상에 혼자 남겨졌다’는 생각으로 이어졌을 거고요. 그리고 그 깊은 외로움은 결국 ‘사랑받고 싶다’는 절박함으로 연결되지 않았을까 싶어요.

사람은 누구도 외로움을 좋아하지 않잖아요. 저 역시 이 작품을 준비하면서 제 인생에서 가장 깊이 ‘외로움’이라는 감정을 마주했던 것 같아요. 연습실에서 여러 번 울기도 했고, 제 안에 있는 외로움과 대런의 외로움이 맞닿는 순간들도 있었고요. 그가 사랑받고 싶어 했던 마음, 그리고 그 마음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몰랐던 미숙함이 제 17살과도 겹쳐져서 더 안쓰럽게 느껴졌어요.

결국 대런의 이해하기 어려운 행동들을 표현하려면 그의 겉모습보다는 심리의 중심, 가장 깊은 감정의 뿌리에 다가가야 했던 것 같아요. 그 방식이 세상엔 어떻게 보이든, 그 안에 있는 진심만은 놓치지 않으려고 정말 많이 애썼어요.”

Q.영국 연출가 매튜 아일리프가 내한해서 함께 작품을 만들었는데, 연출가와는 어떤 이야기를 많이 나눴나요?

“대본을 보면 마크의 정서나 상황은 비교적 사실적으로 묘사돼 있어서 관객에게도 잘 전달되더라고요. 그런데 대런은 심리적 배경이나 삶의 환경이 많이 생략돼 있어서, 그걸 좀 더 분명히 이해하고 표현하려고 매튜와 이야기를 많이 나눴어요. 쉽게 말하면, 대본에 비어 있는 부분들을 함께 채워 나가는 과정이었죠. ‘대런은 어떤 사람이 되고 싶어할까?’, ‘어떤 사람은 되고 싶지 않을까?’, ‘블레이즈랑은 얼마나 자주 만났을까?’, ‘아버지와의 관계는 어땠을까?’, ‘엄마의 죽음은 어떻게 일어났을까?’ 같은 질문들을 계속 던지면서 대사 너머의 세계를 구체화해 나갔어요. 그렇게 해야 대런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진짜 감정의 무게가 담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번역 이야기도 꽤 깊이 나눴어요. 연습실에 원어 대본도 함께 있었고, 제가 영어를 유창하게 하진 않지만 작가의 원래 의도를 곱씹으면서 한국어 대본도 계속 다듬어 갔죠. 연출진과 배우들이 함께 모여서 어떤 단어가 더 직관적이고 관객에게 잘 와닿을지 끊임없이 점검했어요.

국내 초연 작품을 작업할 때는 배우에게 큰 자유가 주어지는 동시에, 큰 책임도 따르는 것 같아요. 아무런 레퍼런스도 없는 상황에서, 오히려 배우가 스스로 텍스트와 끝까지 부딪히며 인물을 찾아 나가야 하니까요. 이번에도 모두가 치열한 과정을 거쳤고, 그렇게 해서 영국 배경의 이 작품이 한국 관객에게 ‘우리의 이야기’로 다가가길 바라며 진심을 다해 준비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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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공연 중 가장 좋아하는 장면을 꼽자면요?

“가장 좋아하는 장면은 마크가 대런이 건넨 마리화나를 처음 피우는 장면이에요. 동시에 대런은 블레이즈와 첫 경험을 시도하고요. 그리고 마지막에 마크의 환상 속에 대런이 등장해서 “안녕, 마키”라고 말하잖아요. 저는 그 장면이 특히 마음에 와닿아요. 각자의 ‘첫 경험’의 끝에 결국 서로가 존재하고 있으니까요.

표면적으로 보면 이 작품은 마크의 이야기라서, 그 장면에서 대런은 마크의 환상 속 이미지로만 등장해요. “날 잡아줄 거야”라는 대사와 함께요. 근데 저는 대런 입장에서 봤을 때, 블레이즈와의 첫 경험이 실패로 끝난 그 순간, 머릿속에 떠오른 사람이 마크였을 것 같았어요. 시간의 끝자락에서 불쑥 떠오른 얼굴, 그게 마크였다는 사실이 대런에게도 사랑의 시작이었지 않았을까 싶더라고요. 그래서 이 장면이 두 인물의 감정이 겹쳐지는 아주 섬세하고 아름다운 순간처럼 느껴졌고, 개인적으로도 가장 좋아하는 장면이에요.”

Q.‘대런’에게 ‘마크’는 어떤 사람인가요? 혹은 각 캐스팅의 ‘마크’마다 다르게 느껴지나요?

“저는 마크가 대런에게 세상과 자신을 연결해주는 ‘연결 고리’ 같은 존재라고 생각해요. 17살의 대런에게 마크는 기댈 수 있는 유일한 친구이자, 돌아가신 엄마를 대신해 자신을 이해해주는 사람이었을 거고요. 그리고 4년 뒤에 다시 만났을 땐, 대런에게 남아 있는 마지막 가족 같은 존재였을 거예요. 감옥에서 나온 대런에게는 더 이상 어떤 연결 고리도 없거든요. 아버지도 세상을 떠났고, 울타리 밑에서 주워 키웠던 쥐조차도 마크를 통해 죽음을 전해 듣게 되니까요. 4년 후 카페에서 나누는 대화들을 되짚어 보면, 전부 대런의 ‘상실’에 관한 이야기예요. 대런에게 세상은 아직 ‘입동’인데, 마크는 유일하게 뜨겁고 따뜻했던 ‘여름’ 같은 존재였던 거죠.

그리고 함께 연기하는 마크 배우마다 분위기가 조금씩 달라요. 4년 후 카페 장면에서 특히 그런 차이가 도드라지는데요. 휘종이의 마크는 중심이 단단하고 이성적인 느낌이 강해서, 제가 더 조심스럽게 다가가야 할 것 같고요. 반면 성태나 성현이와 함께할 때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더 장난스럽고 편하게 다가가는 제 모습을 발견하게 돼요. 그래야 제 이야기를 잘 들어줄 것 같고, 반응도 받을 수 있을 것 같아서요. 공연 때마다 쌓이는 감정에 따라 그 장면의 톤도 조금씩 달라지는데, 제가 마크를 어떻게 느끼고 있는지가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순간이라서 그 장면이 참 소중하게 느껴져요.”

Q.서준 씨랑 휘종 씨는 한예종 동기인데 15년을 봐온 친구랑 2인극으로 호흡을 맞추는 건 어땠나요?

“휘종이랑은 스무 살에 처음 만났고, 군 입대를 앞두고는 동반입대를 하기로 했었어요. 즉흥 연기 수업 시간에 교수님께 양해를 구하고, 노트북 펴서 둘이 같은 날짜로 입영 신청했던 기억이 아직도 나요. 저는 휘종이랑 있을 때 가장 편한 것 같아요. 제가 예민할 땐 휘종이가 대범하고, 또 반대로 제가 좀 대범해지면 휘종이는 예민해지기도 하면서 서로 잘 의지했던 것 같고요. 아쉽게도 휘종이가 다리를 다쳐서 같이 입대하진 못했지만, 졸업 공연도 같이 하고 같은 해에 졸업했어요. 서로 어떤 과정을 거쳐 성장해왔는지를 잘 알기 때문에, 꾸준히 응원하면서 살아왔어요.

‘베이컨’을 함께한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 제일 먼저 휘종이한테 전화를 걸었고, 궁금한 것들을 물어보기도 했어요. 연습 시작 전에 따로 만나 대본 분석도 함께 했고요. 오랜만에 무대에 서는 저를 옆에서 많이 도와줬어요. 그래서 개막 첫 공연 날, 무대 위에서 휘종이 손을 잡고 ‘고마워. 네가 있어서 진짜 다행이야’라고 말했어요.

휘종이는 무대 위에서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제 마음을 소리의 결, 얼굴빛만으로 알아채는 사람이에요. 숨 쉬는 타이밍, 눈 마주치는 속도, 대사 끝 호흡까지도 너무 자연스럽게 맞춰지는 그 감각이 이 작품 안에서 제가 더 깊이 숨 쉴 수 있게 해줘요. ‘베이컨’을 하면서 새삼 더 고맙고, 진짜 많이 배우는 친구이자 동료예요.”

Q.제목 ‘베이컨’은 영국에선 흔한 음식이고, 극 중 ‘베이컨롤’은 두 사람이 친구가 되는 중요한 매개잖아요. 이 제목을 어떻게 해석하셨나요? 그리고 본인에게 ‘베이컨롤’ 같은 음식이 있다면요?

“저는 ‘베이컨롤’을 나와 네가 ‘우리’가 되어가는 과정의 상징처럼 느꼈어요. 겉보기엔 그냥 평범한 음식이지만, 그 안에는 두 사람이 서로를 받아들이고 스며드는 감정의 시작이 담겨 있잖아요. 누구나 겪는 아주 일상적인 경험 같지만, 다시 들여다보면 그게 또 엄청 ‘특별한’ 경험일 수 있거든요.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나를 좋아해주는 순간처럼요. 두 개의 세상이 겹치고, 하나의 주파수로 맞춰지는 느낌. 그래서 이 작품을 하면서 ‘평범한 특별함, 혹은 특별한 평범함’이라는 말이 떠오르더라고요.

우리가 너무 익숙해서 당연하게 여겼던 것들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되고, 그 안에서 감사함과 소중함을 다시 새기게 되는 작품이었어요. ‘베이컨’은 정말 그런, 아주 사소한 것들을 다시 보게 만드는 매력이 있는 연극인 것 같아요.

저한테 ‘베이컨롤’ 같은 음식을 꼽자면 단연 ‘떡볶이’예요. 남녀노소 누구나 좋아하고, 한국 사람이라면 한 번쯤은 추억이 있을 음식이잖아요. 근데 곰곰이 생각해보면 떡볶이 같은 분식은 아무나 함께 먹을 수 있는 음식은 아닌 것 같아요. 처음 만나는 사이거나 어색한 관계에서는 괜히 격식 차리게 되잖아요. 그런 경계를 분식이 자연스럽게 허물어주는 것 같아요. 접시에 함께 담긴 떡볶이, 순대, 튀김을 이쑤시개나 젓가락으로 나눠 먹다 보면 마음의 거리도 금세 좁아지는 느낌이 들죠. 저는 그런 정다움, 따뜻함이 참 좋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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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학창시절엔 어떤 학생이었나요? 10대 시절을 대표할 에피소드가 있다면요?

“이 질문은 사실 쉽게 대답하기가 좀 어렵더라고요. 학창 시절의 저는 ‘정해진 틀’보다는 ‘느낌’을 따라가는 스타일이었어요. 겉으론 잘 적응하는 학생처럼 보였겠지만, 속으론 늘 예민하고 불편해서 어디든 도망가고 싶은 막연한 갈망 같은 게 있었거든요. 까칠한데 겁은 많고, 순종적인데 또 예민하고. 그러면서도 설명은 못 해도 무언가 내 안에서 꿈틀대는 감정을 느낄 줄은 아는 아이였던 것 같아요.

수업 시간에 창밖을 멍하니 바라보거나, 이유 없이 거리를 오래 걷기도 했고요. 대학에 붙었을 때도 합격증 한 장이 모든 노력의 결과라는 게 허무하게 느껴져서, 그냥 혼자 제주도 올레길을 떠났던 적도 있었어요. 교과서보다 제 마음 들여다보는 데 더 익숙한 학생이었던 것 같아요.

연기라는 꿈을 갖기 전까진 미래에 대한 뚜렷한 계획도 없었어요. 그래도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을 꼽자면, 고2 야간자율학습 시간이 떠올라요. 그날은 선생님이 안 계셔서 친구들이랑 장래희망 얘기를 자유롭게 나눌 수 있었는데, 그중 한 친구가 ‘자기는 산업디자인을 전공해서 현대차에 들어가고 싶다’고 하더라고요. 그 말이 너무 구체적이고 현실적이라 17살 입에서 나오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충격이었어요. 그날 이후, 막연하게 ‘느끼는 아이’였던 제가 처음으로 ‘생각하는 아이’가 되려고 했던 것 같아요.

다음 날, 하고 싶은 전공이랑 직업을 쭉 적어보면서 하나씩 다 경험해보자고 마음먹었어요. 운동도 해봤고, 경호원을 꿈꿔본 적도 있고, 법학, 경영, 사진, 그리고 결국은 연기까지. 사실 그 시작은 더 어릴 때였죠. 아버지가 영화를 좋아하셔서 주말이면 비디오 가게에 갔었고, 그 영향으로 배우라는 직업을 일찍부터 알게 됐어요. 중학생 땐 엄마를 졸라 방학 동안 연기학원을 다니기도 했고요. 무대 위에서는 모든 감정이 허용된다는 게 저한텐 환상적으로 느껴졌고, 그 자유로움에 이끌려 연극영화과를 준비하게 됐어요.

이 얘기가 에피소드가 될지 모르겠지만, 그 야간자율학습 시간의 공기, 분위기, 그리고 제가 느낀 감정은 아직도 제 10대를 가장 선명하게 대변해 주는 기억이에요.”

Q.올 한 해 남은 시간은 어떻게 보내고 싶으세요?

“이제 한 해의 절반을 조금 넘긴 시점인데, 사실 뚜렷한 계획은 아직 없어요. 지금은 매체 촬영과 공연을 동시에 병행하고 있어서, 일단은 이 두 작업을 끝까지 잘 마무리하고 싶다는 마음이 가장 커요.

그리고 작년부터 대학원 공부를 시작했어요. 졸업하고 나서 연기를 좀 더 깊이 있게 공부하고 싶다는 생각은 늘 있었는데, 활동하면서 자연스럽게 미뤄졌었거든요. 그러다 작년에 용기 내서 다시 도전하게 됐고, 지금은 공부와 작품 활동을 함께 이어가면서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어요.

크게 거창한 목표보다는, 오늘 하루를 후회 없이 잘 살아내는 데 집중하고 싶어요. 그렇게 하루하루를 진심으로 채우다 보면, 어느새 올해의 끝도 자연스럽게 맞이하게 되지 않을까싶어요.”

위수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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