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일 방송된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이하 '꼬꼬무')에서는 '낙인 - 아이를 가질 수 없는 섬'이라는 부제로 소록도의 가슴 아픈 역사를 깊이 있게 조명했다. 한센병 환자들의 고통스러운 삶과 그들의 후손들이 겪어야 했던 차별과 아픔을 되짚으며, 우리가 기억해야 할 진실을 전했다.

금단의 땅, 소록도에서 발견된 충격적인 유리병 속 태아들
그가 찍은 사진 속에는 충격적인 모습이 담겨 있었다. 유리병 14개 속에는 포르말린에 보존된 태아 표본이 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추가로 발견된 유리병은 총 122개. 그 안에는 태아뿐만 아니라 사람의 장기 표본도 보관되어 있었다.
소록도는 한때 정부에 의해 외부인의 출입이 철저히 금지된 지역이었다. 한센병(나병) 환자들이 격리되어 살아야 했던 섬. 이곳에서는 결혼을 해도 아이를 낳을 수도, 기를 수도, 함께 살 수도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곳에서 태아 표본들이 발견된 이유는 무엇일까? 이 표본들은 왜 오랜 시간 방치된 채 남아 있었던 것일까?

1954년, 5학년 소년 남철의 강제 이별
1954년 6월의 초여름, 열두 살 소년 남철은 예상치 못한 운명의 소용돌이에 휘말렸다. 초등학교 5학년이었던 그는 어느 날 몸에서 이상한 증상을 발견했다. 피부에 붉은 반점이 퍼지고, 손발의 감각이 둔해지는 등 한센병의 초기 증상이 나타났던 것이다.
소록도는 작은 사슴을 닮은 섬으로, 여의도보다 조금 더 넓은 면적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이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은 결코 넉넉하지 않았다. 최대 6천여 명에 달하는 한센병 환자들이 이곳에 강제 격리되었고, 그중 한 명이 된 남철은 가족과 영원히 이별해야만 했다.
소록도는 철저하게 직원 구역과 환자 구역으로 나뉘어 있었다. 두 구역을 가로막고 있는 철조망은 절대 넘어서는 안 되는 금기의 선이었다. 직원들은 한센병 환자들과의 접촉을 철저히 피했고, 대화를 나누는 것조차 눈치를 봐야 하는 상황이었다.
환자들이 생활하는 공간은 극도로 열악했다. 한 칸짜리 작은 방에 무려 8명이 함께 생활해야 했고, 난방은커녕 기본적인 생필품조차 부족했다. 식사는 늘 부족했고, 배고픔은 일상이었다. 남철은 소록도가 치료를 위한 병원이 아니라, 그저 강제 수용소와 다를 바 없는 곳이라고 느꼈다고 한다.

소록도에서 싹튼 사랑과 가혹한 단종 수술
당시 소록도에서는 한센병 환자가 아이를 낳는 것이 금지되어 있었다. 남성은 ‘단종 수술’이라는 불임 수술을 강제적으로 받아야 했고, 여성은 주기적으로 임신 여부를 검사받았다. 만약 임신이 확인되면, 강제로 낙태를 해야만 했다.
남철 부부도 예외는 아니었다. 두 차례 임신을 했지만, 두 번 모두 강제로 낙태를 해야 했다. 이후 남철은 단종 수술을 강요받았고, 결국 두 사람은 영원히 아이를 가질 수 없게 되었다.
더욱 끔찍한 것은, 이렇게 강제로 낙태당한 태아들이 어떻게 처리되었는가였다. 태어난 아이들은 ‘까마귀가 까마귀를 낳지, 까치를 낳을 수 있냐. 한센이 한센을 낳는다’라는 멸시 속에서 유리병에 담겼다. 소록도에서 발견된 태아 표본들은 바로 이처럼 태어날 기회조차 박탈당한 아이들이었다.

부모와 자식이 2미터 거리를 두고 만나야 했던 ‘수탄장’
그럼에도 불구하고 극적으로 태어난 아이들도 있었다. 인수라는 이름을 가진 한 아이가 그중 하나였다. 하지만 인수의 삶도 결코 평탄하지 않았다.
부모와 함께 사는 것은 불가능했기에, 인수는 태어나자마자 소록도의 보육소로 보내졌다. 보육소에서는 한센병 환자의 자녀들을 섬 밖에서 태어났든, 섬 안에서 태어났든 무조건 부모와 분리해 키웠다.
보육소에서 생활하는 아이들은 ‘미감아’, 즉 아직 감염되지 않은 아이라는 뜻으로 불렸다. 그러나 이들에 대한 사회의 시선은 차가웠다. ‘언젠가는 한센병에 걸릴 수도 있는 아이들’이라는 낙인은 아이들에게도 따라다녔다.
부모와 자식이 만날 수 있는 기회는 단 한 달에 한 번뿐이었다. 부모들은 면회일을 손꼽아 기다렸고, 아이들도 이날을 위해 하루 전부터 설레며 잠을 이루지 못했다.
하지만 만남의 방식은 너무나 가혹했다. 부모와 아이들은 2미터 거리를 유지한 채 만나야 했고, 서로 손을 잡을 수도, 안을 수도 없었다. 오직 바라보는 것만 허락되었다.
아이들은 부모가 싸 온 음식을 허겁지겁 먹으며 배고픔을 달랬고, 부모들은 자식의 이름을 부르며 통곡했다. 이 비극적인 만남의 장소는 ‘수탄장’이라 불렸다.
그런데 이마저도 초등학교 졸업과 함께 끝이 났다. 중학생이 되면 소록도를 떠나야 했고, 부모와 다시는 만날 수 없게 되었다.

한센병 환자들의 인권 회복을 위한 끝없는 투쟁
한센병은 전염력이 낮고 치료도 가능한 질병이다. 그러나 사회는 오랫동안 이들을 외면했다.
1992년까지 소록도에서는 단종 수술과 낙태 수술이 강제적으로 시행되었고, 2000년대에 들어서야 이들의 인권이 재조명되기 시작했다.
2006년, 일본 정부는 한센병 피해자들에게 배상을 결정했다. 그러나 한국 정부는 ‘강제성이 없었다’며 책임을 회피했다.
6년간의 법정 투쟁 끝에 대법원은 한센병 환자들에게 강제로 시행된 단종 및 낙태 수술의 책임을 인정하고 국가 배상을 명령했다.

장아름 기자
bnt뉴스 라이프팀 기사제보 life@bn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