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bnt뉴스 최송희 기자 / 사진 권희정 기자] 이마를 가로지르는 깊은 주름, 군데군데 핀 검버섯. 특별할 것 없는 우리 아버지의 얼굴이다. 하지만 그 얼굴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시간의 경이로움, 그것을 넘어선 뭉클한 고집이 발견된다.
영화 ‘국제시장’(감독 윤제균) 개봉 전 한경닷컴 bnt뉴스와 만난 배우 황정민은 특별하지 않아서 더욱 특별한 그 시대의 아버지의 모습을 안고 있었다.
영화계에서도 아버지란, 우리의 아버지의 모습과 별반 다르지 않다. 많은 영화들이 엄마와 아들, 엄마와 딸에 대해 이야기하지만 아버지의 이야기는 그리 심도 있게 다루지 않았던 게 사실이다. 미묘하게 몇 걸음 물러서 있는 듯한 사이. 아버지와 우리의 사이는 그랬다.

영화 ‘국제시장’은 1950년대 한국전쟁 이후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격변의 시대를 관통하며 살아온 우리 시대 아버지 덕수에 대한 이야기다. 열두 살, 한국전쟁으로 피난길에 오르고 스물여섯 살 서독에서 광부로 일하며 외화를 벌었다. 갱도에 갇혀 죽을 뻔한 고비를 넘기고 한국으로 돌아왔더니, 이번엔 또 베트남 파견에 가야한단다. 이제야 꿈을 이루나 했더니 목숨처럼 지켜온 가게 ‘꽃분이네’와 결혼을 앞둔 동생 때문에 결국 베트남으로 날아간다.
어찌 이리 파란만장할까. 하지만 그 시절엔 그랬다. 이게 ‘평범’한 일이었다. 황정민 역시 “얼마나 평범하게 보여야 할까”를 두고 고민하면서 온 신경을 기울였다.
“물론 그가 겪었을 일들이 평범한 사건은 아니었지만, 당시 모든 아버지들이 그냥 삶을 살아왔던 거잖아요. 덕수라는 남자가 입에 풀칠하기 위해 살아가는 모습. 어떻게 해야 평범해 보일까. 정말 평범했으면 좋겠다 싶었죠.”
그는 덕수의 인생을 돌아보면서 “각 시퀀스 별로 짠한 부분이 있었다”고 했다. “로케이션으로 현장에 가면 자연스럽게 감정이 밀려나왔”다. “베트남은 베트남대로, 탄광은 탄광대로” 현장에 있기만 해도 그 당시 아버지들의 짠내가 느껴졌다.
“탄광에서 처음 느낀 건 ‘아, 이걸 어떻게 해야하지’였죠. 너무 좁고 숨 막히기도 하고. 그런 마음이 자연스럽게 들어요. 절박한 마음 같은 거. 이산가족 찾기 같은 경우도 그래요. 남원 KBS에서 찍었거든요. 아, 정말 새로운 경험이었어요. 엑스트라 분들이 그 시절을 이미 겪어본 분들이잖아요. 그 중에 실제로 이산가족이신 분들도 있을 수 있고요. 다 같이 눈물바다가 돼서 장면을 찍었죠.”

황정민이 언급했던 ‘이산가족’ 시퀀스는 실제 이산가족 찾기 영상까지 삽입, 더욱 진지하고 리얼리티 있게 접근했다. 보조 연기자들까지 “카메라에 잡히지 않아도 함께 울어주”고, “집중해서 정말 실제 같이” 찍었다는 장면은 윤제균 감독 역시 이 장면을 다큐멘터리처럼 촬영하고 싶어 했던 부분이다.
1950년대부터 현재까지의 시간을 관통한다는 것. 그리고 관객과 그 시간을 함께 공유하고, 시간의 경이를 몸소 체험할 수 있다는 것은 ‘국제시장’이 가진 강력한 힘이다. 그것은 ‘시간’을 연기하는 배우에게도 공통된 부분이었다.
그는 가장 즐거웠던 시대로 70대를 꼽으면서 “지나가는 사람들이 못 알아보고, 실제로 상인인 줄 알고 가격을 물어보곤 했다”며 웃음을 터트렸다. 그럴 만 했다. 70대 노인 분장을 한 황정민의 눈빛, 걸음걸이, 앉은 모양새는 영락없는 70대 노인이었던 것이다.
“모델은 없어요. 그냥 공원에서 할아버지들을 보고 연구했어요. 예전에 뮤지컬 ‘맨 오브 라만차’ 돈키호테 역할을 하면서 노인에 대해 많이 공부했었거든요. 할아버지들 인터뷰도 하고요. 그런 디테일들을 많이 봤죠. 손 모양, 자리에서 일어나는 것들. 그랬던 게 도움이 많이 된 것 같아요.”
황정민은 ‘국제시장’의 노인 분장이, 역대 국내 영화들의 노인 분장들 중 가장 빠른 시간에 완성됐다고 자랑했다. 그는 “분장을 받는 시간을 견딜 자신이 없어”서, 시작 전부터 제작진에게 “가장 빨리 분장을 완성할 수 있는 팀으로 해달라”고 요구했었다.
“분장은 중요하지 않아요. 관객들도 그냥 ‘노인분장을 했구나’ 싶은 거지, 주름이 어떻고 검버섯이 어떻다고 하진 않거든요. 가장 중요한 건 연기적인 거죠. 등이 굽은 모습, 손 떨림, 걸음걸이나 말투 같은 것들. 그런 것들이 있어야 관객들이 노인으로 인정해주지 분장만 노인이고 행동이 젊으면 안 돼요. 그래서 분장을 받는 동안 힘을 다 빼버릴 것 같아서 분장 보다는 연기에 더 집중했어요. 이미 노인 연기를 해봤으니, 일종의 자신감일 수도 있고요.”

‘국제시장’의 덕수와 같은 삶을 살았던 중년들도 그렇지만, 20대 관객들이 영화를 어떻게 볼지 궁금하다는 황정민은 “사실 한 세대 정도밖에 차이가 안 나는 이야기인데 요즘 세대들이 보면 먼 나라, 남의 이야기처럼 느껴질 것 같다”고 말한다.
“그만큼 우리나라가 급속도로 성장했기 때문일까요? 제가 빗대서 생각하건대, 핸드폰과 비슷하다는 기분이 들어요. 스마트폰을 쓰기 전에 우리 모두 2G폰을 썼잖아요. 삐삐도 그렇고요. 하지만 지금 보면 우리는 처음부터 스마트폰을 쓴 것처럼 행동하고 생각하죠. 우리의 역사도 그래요. ‘국제시장’은 그 과정에 대해 생각하고자 하는 거죠.”
지금을 만들어준 기억. 현재가 있기까지의 과정. 황정민은 “20대 친구들이 ‘국제시장’을 보면서 역사를 배우기보다는 ‘우리 부모님이 보면 더 좋을 것 같다’는 생각만 해줘도 합격이라고 본다”고 더했다.
“나중에 부모님께 얘기할 거 아니에요. ‘국제시장’이라는 영화가 있는데 엄마, 아빠가 보면 좋겠더라. 뭐 그런 이야기들이요. 잠깐이지만 영화를 통해서 부모님과 몇 마디 나눈다면 그것만으로도 족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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