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갑자기 더워진 날씨는 사람을 금세 지치게 만든다. 아직 마음은 봄에 머물러 있는데, 몸은 먼저 여름을 통과한다. 계절은 점점 앞당겨지고, 도시는 더위 속에서도 멈추지 않는다. 사람들은 에어컨 리모컨을 찾고, 얼음 음료를 들고, 냉방이 잘되는 공간으로 이동한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여름을 떠올릴 때 마음에 먼저 남는 것은 차가운 기계보다 낡은 선풍기와 크게 쪼갠 수박이다. 덜덜거리며 돌아가던 바람, 수박물이 손끝에 묻던 오후,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괜찮았던 느린 시간. 이 그림은 그 기억에서 출발했다.
화면 속에는 한복을 입은 내숭녀와 갈색 포니가 나란히 있다. 초록색 선풍기는 두 존재를 향해 바람을 보내고, 바닥에는 잘 익은 수박이 놓여 있다. 내숭녀는 수박 한 조각을 들고 있고, 포니도 수박을 먹는다. 옆에는 건초가 가득 실린 수레가 놓여 있다. 말의 공간과 사람의 여름이 한 화면 안에서 자연스럽게 겹친다. 달려야 할 말은 멈춰 있고, 바쁘게 살아야 할 사람도 잠시 앉아 있다.
그래서 이 그림에서 말은 달리지 않는다. 이기지도 않고, 경쟁하지도 않는다. 그저 선풍기 앞에서 수박을 먹는다. 이 단순한 장면이 오히려 낯설게 느껴진다면 그것은 우리가 말뿐 아니라 사람에게도 너무 자주 달리는 역할만 부여해 왔기 때문일 것이다. 말은 빠르게 달려야 하고 사람은 성과를 내야 한다. 말은 관리받아야 하고 사람은 스스로를 관리해야 한다. 몸은 지치는데 사회는 계속 컨디션을 요구한다.
선풍기는 이 장면의 정서를 붙잡는 중요한 사물이다. 그림 속 선풍기는 실제로 오래 사용하던 낡은 초록색 선풍기에서 출발했다. 요즘의 냉방 기기처럼 완벽하게 온도를 낮춰 주지는 못하지만 선풍기에는 여름의 시간이 남아 있다. 회전하는 바람, 덜덜거리는 소리, 수박 껍질이 쌓인 오후, 잠깐씩 눈을 감게 만드는 느린 순간. 에어컨이 더위를 지우는 장치라면 선풍기는 더위를 함께 견디게 하는 장치에 가깝다.
수박도 마찬가지다. 수박은 혼자 먹기보다 함께 나눌 때 더 선명해지는 음식이다. 칼로 크게 가르고, 접시에 올리고, 한 입씩 베어 무는 동안 사람들은 잠시 같은 계절 안에 머문다. 〈썸마(馬) 타임〉에서 수박은 사람과 말 사이에 놓인 작은 식탁이다. 종이 다르고 말이 통하지 않아도, 더위와 단맛은 함께 나눌 수 있다. 이 그림에서 식구란 혈연이나 가족 제도만을 뜻하지 않는다. 같은 바람을 맞고 같은 계절을 견디며 무언가를 나누어 먹는 사이가 식구가 될 수 있다.
한복을 입은 내숭녀의 모습은 이 장면을 더욱 묘하게 만든다. 붉은 저고리와 반투명한 치마는 전통의 단아함을 품고 있지만, 자세는 격식과 거리가 멀다. 내숭녀는 말 옆에 앉아 수박을 먹고 있다. 한국화의 재료인 한지와 수묵담채, 콜라주로 표현된 치마의 투명한 결은 바람과 더위, 살갗의 감각을 은근히 드러낸다. 전통 복식과 낡은 선풍기, 수박과 포니가 한 화면 안에서 만나며 이 장면은 과거의 풍속화가 아니라 지금 이 시대의 여름 풍경이 된다.
그런 점에서 선풍기 앞에서 말과 수박을 나누는 이 장면은 단순한 피서가 아니다. 달리지 않아도 되는 시간, 쓸모를 증명하지 않아도 되는 몸, 성과와 무관하게 존재하는 기쁨을 그리고 싶었다. 말이 달리지 않을 때도 말이듯 사람도 성과를 내지 않을 때 여전히 사람이다. 그런데 우리는 왜 쉬는 순간마저 자신을 설명해야 할까. 왜 멈춤은 곧 뒤처짐으로 오해될까.
〈썸마(馬) 타임〉이라는 제목은 여름을 뜻하는 ‘Summer’와 말 마(馬)를 겹친 말장난에서 시작되었다. 하지만 그 안에는 조금 더 오래 남는 질문이 있다. 우리는 언제부터 달리는 존재만 가치 있다고 믿게 되었을까. 쉬는 시간은 삶의 빈칸일까. 말과 사람이 같은 바람을 맞는 이 장면은 그 질문 앞에 잠시 우리를 세운다.
더운 날, 선풍기 바람 앞에서 수박을 나누어 먹는 시간은 짧다. 수박 한 조각은 금세 사라지고 바람은 충분히 시원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그 순간만큼은 사람과 말이 같은 속도로 숨을 쉰다. 어쩌면 삶에서 가장 필요한 휴식은 완벽한 냉방이나 긴 휴가가 아니라, 곁에 있는 존재와 같은 바람을 맞는 시간인지도 모른다.

한국화가 김현정은 선화예중·예고와 서울대학교 동양화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현대 한국인의 삶과 감정을 유머와 풍자로 풀어낸 21세기 풍속도 〈내숭 시리즈〉로 널리 알려졌으며, 이를 통해 한국 사회의 모습을 ‘한국의 초상’이라는 시선으로 그려 왔다. EBS ‘해요와 해요’서 댕기언니로 활동했으며 서울시와 희망브릿지 홍보대사를 맡고 있다. 30만 팔로워와 소통하며 국내외 전시와 강연을 통해 한국화의 새로운 가능성을 모색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