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노란 저고리를 입은 인물이 소반 가득 늘어놓은 김장 재료 앞에 앉아 있다. 곱게 틀어 올린 머리에 자잘한 장식을 꽂았고, 소매를 걷어붙인 손끝은 붉은 양념물로 물들어 있다. 절인 배추 몇 포기와 무, 파, 마늘, 고춧가루 양념이 그릇마다 정갈하게 놓여 있고, 화면 한쪽에는 붉은 낙관이 조용히 자리를 지킨다. 그런데도 화면을 크게 감싼 여백은 이상하게 허전하지 않다. 마치 그 넓은 자리에 놓여 있어야 할 수많은 배추들이 여백 속으로 생략된 것처럼, 보이지 않는 노동의 총량이 오히려 더 크게 짐작된다. 한지 위에 여백을 남기는 한국화 특유의 화법이, 화면에 다 담지 못한 노동의 부피를 상상하게 만드는 셈이다.
제목의 '포기'는 두 가지 뜻을 동시에 품는 중의적 표현이다. 하나는 배추를 세는 단위인 '한 포기, 두 포기'이고, 다른 하나는 중도에 그만둔다는 뜻의 '포기(抛棄)'다. "포기는 배추 셀 때나 쓰는 말"이라는 오래된 농담을 빌려, 필자는 여백 속에 생략된 그 많은 배추 앞에서 인생과 결혼에 대한 다짐을 함께 쌓아 올리고 싶었다.
어릴 적 친정어머니의 김장날을 떠올려 보면, 마당 가득 채반과 대야가 늘어서고 온 가족이 하루 종일 매달리던 풍경이 선명하다. 손끝은 트고 허리는 끊어질 듯했지만, 김치통이 하나둘 채워지는 걸 지켜보던 어머니의 얼굴에는 알 수 없는 뿌듯함이 있었다. 지금 와서 다시 생각해 보면 그것은 단순한 노동의 결과물이 아니라, 한 해 가족의 안녕을 스스로 확인하는 조용한 의식에 가까웠던 것 같다.
이 장면은 필자의 이야기 같기도 하고, 명절을 앞두고 부엌이나 마당, 혹은 마트 장바구니 앞에 서 있는 누군가의 이야기 같기도 하다. 집집마다 명절을 준비하는 방식은 다르지만, 저마다 맡은 역할에 따라 감당해야 할 바쁨이 있다는 점은 다르지 않다. 누군가는 장을 보고, 누군가는 음식을 만들고, 누군가는 먼 길을 운전해 부모님을 모시러 가고, 누군가는 아이들을 챙긴다.
물론 부엌에서의 수고는 여전히 여성, 특히 며느리와 딸에게 쏠리는 경우가 많다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다. 하지만 모든 집이 똑같은 방식으로 명절을 치르는 것은 아니다. 어떤 집에서는 남성들이 무거운 짐을 나르고, 차례상을 차리기 전 장을 보고, 운전대를 잡고 먼 길을 오가며, 차례 앞에 서서 절을 이끈다. 명절이라는 무대 위에는 저마다 다른 역할이 배정되어 있을 뿐, 누구도 완전히 열외인 사람은 없다. 그 역할의 무게가 저울처럼 똑같이 나뉘어 있는가는, 여전히 집집마다 다시 물어야 할 질문으로 남아 있다.
청년 세대 사이에서 근래에 회자되는 '조용한 사직'이라는 말과 이 그림을 나란히 놓아보면 흥미롭다. 하나는 더 이상 애쓰지 않기로 한 마음이고, 다른 하나는 끝까지 애써 보기로 한 마음이다. 어느 쪽이 더 낫다고 말할 수는 없다. 다만 두 마음 모두, 지치지 않기 위해 저마다 찾아낸 나름의 생존 방식이라는 점에서는 다르지 않다.
그런데도 명절을 아예 건너뛰지는 못하는 집이 많다. 안 하자니 어쩐지 찜찜하고, 어른들 보시기에도 마음이 편치 않다. 그래서인지 요즘 부모 세대에서는 "이 정도는 내 대에서 끝내겠다"는 말이 부쩍 자주 들린다. 자신은 어릴 때부터 보고 자란 방식대로 어떻게든 명절을 치르면서도, 정작 자식에게는 그 수고와 중압감을 물려주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다. 차례상을 반으로 줄이고, 전을 부치는 대신 사 온 음식을 올리고, 온 가족이 모이는 대신 화상통화로 인사를 나누는 집들이 하나둘 생겨나는 것도 그런 마음의 결과일 것이다. 누군가는 이를 두고 전통이 옅어진다고 아쉬워하겠지만, 다른 누군가에게는 다음 세대의 어깨를 가볍게 해 주려는 나름의 배려로 읽힌다.
이 그림이 여전히 마음에 남는 이유는, 필자가 정말로 포기하지 않겠다고 다짐한 대상이 노동 그 자체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배추 더미 앞에서 그만두고 싶어지는 순간에도 가족을 먹이겠다는 마음, 함께 사는 이들을 지켜내겠다는 의지를 다시 세우는 것. 이 그림 속에서 진짜 포기하지 않는 것은 김장이라는 노동이 아니라, 힘든 순간에도 웃음을 잃지 않으려는 태도이고, 지치더라도 곁을 지키겠다는 마음이다.
한 포기, 두 포기 배추를 세듯, 이번 명절에도 저마다 다짐을 하나씩 쌓아보면 좋겠다. 무엇을 사고 무엇을 손수 만들지는 각자의 선택이고, 그 선택을 다음 세대에 얼마나 물려줄지도 각자의 몫이다. 다만 그 선택 앞에서 스스로를 탓할 이유는 없다. 맵고 짠 시간을 지나야 비로소 깊은 맛이 드는 김치처럼, 우리가 통과하는 이 계절도 결국 그렇게 익어가는 것은 아닐까.

한국화가 김현정은 선화예중·예고를 거쳐 서울대학교에서 경영학과·동양화과 학사와 동양화과 석사·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김현정 작가는 현대 한국인의 삶과 감정을 유머와 풍자로 풀어낸 21세기 풍속도 〈내숭 시리즈〉로 널리 알려졌으며, 다수의 개인전과 전시 작품 완판, 6만 7402명의 국내 개인전 최다 관람객 기록 등으로 주목받았다. 김현정 화가의 작품은 초·중·고 교과서 31종에 수록되어 있으며, 현재 서울시 홍보대사로 활동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는 그림에세이 《김현정의 내숭》, 컬러링북 《내숭이야기 컬러링북》, 《한국화를 배우는 시간: 개념편》, 《한국화를 그리는 시간: 실기편》 등이 있다. 또한 김현정 작가는 미술강연과 강의를 이어가는 교수로서 전통 회화와 동시대 시각문화를 연결하고 있으며, 30만 팔로워와 소통하며 국내외 전시·교육·집필·칼럼을 통해 한국화의 새로운 가능성을 확장하고 있다.
글_김현정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