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회는 빠르게 변한다고 말한다. 매일 새로워지는 기술 속 직업은 바뀌고 문화는 국경을 넘나든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어떤 역할은 잘 바뀌지 않는다. 육아는 여전히 엄마의 몫으로 쉽게 돌아가고 집밥과 돌봄은 여성의 책임처럼 남는다. 가정 안의 요리는 여성에게 기대하면서도, 이름난 요리사와 권위 있는 셰프의 자리에는 남성의 얼굴이 먼저 떠오른다. 얼마 전 한 여성 유명 중식 요리사의 인터뷰를 읽었다. 그는 거친 주방에서 버티기 위해 아이라인을 두껍게 그렸다고 했다. 그 말이 오래 남았다. 어떤 세계에서는 꾸밈조차 장식이 아니라 갑옷이 된다.
미술계도 크게 다르지 않다. 많은 미대 강의실에는 여학생들이 많다. 그러나 교수의 자리, 심사의 자리, 미술사에 오래 남는 이름의 자리로 올라갈수록 남성의 이름이 더 익숙하게 호명된다. 고흐, 피카소, 김홍도, 신윤복. 미술을 처음 배울 때부터 우리는 위대한 화가의 이름을 대부분 남성으로 배운다. 여성은 그림을 배우는 자리에는 많지만, 그림의 기준을 정하는 자리에는 여전히 적다. 유리천장은 그렇게 보이지 않는 공기처럼 놓여 있다. 만질 수 없지만 부딪히고, 없다고 하지만 분명한 벽이다.
폼에 살고 폼에 죽는다는 ‘폼생폼사’라는 말은 흔히 겉멋을 강조하는 말로 쓰인다. 하지만 이 작품에서 폼은 허세가 아니다. 폼은 자세이고, 생존 방식이며, 세상 앞에 자기 몸을 세우는 태도다. 여성에게 너무 오래 요구되어 온 것은 내용 없는 단정함이었다. 조용해야 하고, 튀지 않아야 하고, 똑똑하되 위협적이면 안 되고 아름답되 욕망을 드러내면 안 된다. 그 요구 앞에서 폼을 잡는다는 것은 단순히 멋을 내는 일이 아니다. “이 모습으로도 여기 설 수 있다”라는 선언이다. 스냅백은 장식이 아니라 표식이고, 운동화는 편의를 넘어 이동의 권리다. 스케이트보드는 위험하지만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도구다.
폼생폼사는 어쩌면 삶의 가장 깊은 문제와 닿아 있다. 인간은 무엇으로 자신을 지키는가. 어떤 자세로 세상 앞에 서는가. 어떤 모양을 선택해야 자기 자신을 잃지 않는가. 이 작품에서 폼은 겉모습이 아니라 존재의 방식이다. 새 신을 신는다는 것은 단순히 신발을 바꾸는 일이 아니다. 어제의 바닥을 딛고, 오늘의 공중으로 몸을 던지는 일이다.
한국화에 대한 고정관념도 이 작품 안에서 함께 흔들린다. 한국화는 조용해야 한다고들 생각한다. 먹과 한지, 여백과 한복은 고요함과 단아함의 언어로 자주 묶인다. 그러나 전통이 반드시 정지해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한복은 박물관 유리장 안에서만 존재하는 옷이 아니고 한지는 옛 정서를 보관하는 재료만도 아니다. 이 작품에서 한복은 움직인다. 치마는 부풀어 오르고 고름은 휘날리며 먹선은 몸의 속도를 따라 흔들린다. 한지는 가볍게 떠오르며 공중의 긴장을 붙잡는다. 한국화가 고리타분하다는 말에 가장 정확히 답하는 방식은 설명이 아니라, 이렇게 실제로 뛰어오르는 화면일지도 모른다.
그림 속 내숭녀의 웃음은 밝다. 하지만 그 밝음은 아무 걱정 없는 가벼움이 아니다. 버티기 위해 아이라인을 두껍게 그렸다는 어느 요리사의 말처럼, 이 작품의 폼도 버티기 위한 장치에 가깝다. 여성에게 요구되는 얌전함, 한국화에 덧씌워진 낡은 이미지, 미술계 안에서 반복되는 보이지 않는 기준을 통과하기 위해서는 때로 더 과장되게 웃고, 더 힘껏 뛰고, 더 선명하게 자신을 드러내야 한다. 이 밝은 점프 안에는 그만큼의 긴장과 저항이 숨어 있다.
그렇다면 이 점프는 어디에 착지할까. 유리천장을 완전히 깨뜨린 자리일까, 아니면 또 다른 천장 아래일까. 아직 알 수 없다. 다만 분명한 것은 하나다. 내숭녀는 이미 뛰어올랐다. 한국화도 더 이상 얌전히 앉아 있어야 할 이유가 없다.
한편 위 작품은 현재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후기졸업전 석・박사 학위 청구전」에 전시 중이다. 전시는 6월4일 목요일부터 6월8일 일요일까지, 서울대학교 관악캠퍼스 미술대학에서 열린다.

글_김현정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