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음악을 감상할 때 스트리밍보다는 시디, 바이닐이 더 좋을 수 있다. 단순히 피지컬 매체를 직접 핸들링하는 감성을 말하는 게 아니다. 스트리밍은 한 앨범의 수록곡을 집중(혹은 인내)해서 다 듣기는커녕 타이틀이 마음에 안 들면 터치 한 번으로 다른 가수나 앨범을 쉽게 들을 수 있다. 반면 시디, 바이닐은 플레이어에 넣고 듣기 시작한 이상 바꾸기 귀찮아서라도 끝까지 듣게될 가능성이 크다. 플레이어 앞에 가서 톤암을 직접 들어 트랙을 변경해야하는 바이닐은 말할 나위 없다.
아이러니하게 이런 불편함이 주는 강제성은 한 아티스트의 음악을 좀 더 온전히 즐길 수 있는 기회가 되기도 한다. 지난 3월21일 공개된 서리(Seori) 미니 2집 'fake happy'는 피지컬 매체가 주는 특유의 집중력으로 접근하면 감상의 즐거움이 배 이상이 되는 앨범이다. 수록곡 4곡이 전달하는 메세지의 기승전결이 뚜렷하고, 그에 맞게 사운드 연출도 다채롭게 이뤄졌다. 동명타이틀곡 한 곡 만으로 서리의 매력을 느끼기에는 못내 아쉬울 정도.
"'kill the day' 'broken' 'and me' 세 곡이 먼저 준비돼 있었다. 'kill the day'는 밝은 곡인데 'broken' 'and me'는 상대적으로 톤다운된 곡들이었다. 세 곡을 연결시켜줄만한 곡이 필요했다. 대중성에 대한 고민도 있어서 외부에서 곡을 받고 싶다고 회사에 먼저 제안했다. 뮤지션으로서 확고한 색채도 좋지만, 다양한 모습을 보여주고 싶기도 했다. 비슷한 환경에서 작업하다 보면 결과물도 비슷해지지 않을까 우려했다. 스스로 갇히는 것에 대한 염려랄까. 그래서 많은 곡을 들어보고 'fake happy'를 타이틀로 결정했다. 데모를 들었을 때 멜로디가 가장 인상 깊었다."

가사도 그렇다. 의미없는 일들로 하루를 날리고 느낀 허탈함을 '그냥 하루를 날려보내자'고 쿨하게 위로하는 'kill the day', 순수함과 꿈으로 가득 찬 이가 현실의 벽에 굴복하고 타협하는 과정에서 느끼는 회의감과 자조감을 표현한 'fake happy'의 위태위태함은 외로움과 혼란스러움, 열등감을 담아낸 'broken'에서 절정에 달한다. 그리고 군중 속에서 남들과 어울리지 못하며 느끼는 외로움을 묘사한 'and me'로 과감하다고 느껴질 정도로 내 안의 어두운 나에게 집요하게 다가간다.
"처음부터 끝까지 사람을 중심에 두고, 외면에서 내면으로 걸어들어가듯 가사를 썼다. 나라는 사람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게 진정한 위로가 된다고 생각했다. 스스로를 직시하는 게 그 무엇보다 어렵지만, 그 과정을 통해 성장할 수 있구나, 사람은 누구나 부족한 부분이 있으니 나도 헤쳐나갈 수 있겠구나라고 위로를 받았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작업했다."
"'스킷'이라는, 1절짜리 형태의 특이한 구성을 지닌 곡이다. 하고 싶은 이야기는 1절에서 끝났다고 생각했다. 어느날 혼자 있는데, 이유없이 굉장히 외롭다는 느낌이 들어서 사람들이 많은 곳을 찾아갔다. 그런데 오히려 더 큰 외로움이 느껴지더라. 그래서 '물'에 빗대어 표현했다. '말 한마디도 못할 것 같아. 난 물로 만들어졌으니까'란 가사에서 물은 두 가지를 의미한다. 물 속에서 말을 하면 전달이 안 돼니까 단절, 다른 하나는 물에 젖었을 때 느껴지는 특유의 묵직한 우울함이다. '물'을 사운드로 표현하기 위해서 첫번째 벌스에 비오는 밤의 소리를 넣었다. 두번째 벌스부터는 단절됨의 극한을 표현하는 목소리 효과 때문에 빗소리를 뺐다. 그리고 후반부로 갈수록 배경이 조용해지며 기타 소리가 한층 선명해진다. 우울함이라는 물에서 나온 나를 사운드로만 표현하고 싶었다."

배경에 다양한 효과음을 삽입하는 앰비언트 사운드 연출에 대한 서리의 관심은 집착이라고 불러도 무방할 정도로 상당하다. 일례로 서리는 사이렌 소리를 'fake happy' 수록곡에서 다채롭게 활용했다. 'kill the day' 두 번째 벌스 가사가 범죄현장을 표현하는 것에 맞춰서, 'fake happy'는 새벽 1~2시에 시작해서 5~6시에 끝나는 가사의 시간변화에 맞춰 곡 후반부 사람들이 움직이는 느낌이 들게, 'and me'에서는 도시의 밤을 표현하기 위해 사이렌 소리를 넣었다.
"곡을 쓸 때 시작적으로 상상하며 그림을 그리듯 쓰는 걸 좋아한다. 그러면서 어떤 장면이 구체적으로 떠오르게 소리를 만지는 걸 좋아한다. 멜로디를 쓸 때 시각적인 부분을 많이 참고한다. 서리의 노래를 듣는 사람들도 어떤 장면을 떠올렸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서리라는 아티스트는 여러가지 교집합으로 만들어지고 있는 것 같다. 이번처럼 앨범에서 밝음과 어둠이 공존하는, 푸르스름한 느낌이 강한 사람이 됐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음악적으로는 'fake happy'에서 두드러졌던 밴드사운드를 더 활용할지, 좀 더 실험적이고 크리에이티브한 걸 도전할지, 한국정서에 맞는 서정성이 부각되는 음악을 해볼지 등 많은 가능성을 열어두고 있다. 기대해달라."
김치윤 기자 cyk78@bnt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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