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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story Talk] 크리스티앙 디오르 “나는 꽃 같은 여성을 디자인했다”

2014-03-03 10:13:45

[최원희 기자] “우아함이란 구별과 자연스러움, 돌봄, 단순성 등이 네 가지의 바른 조합에서 만들어지는 것이다. 이를 벗어나면 가식만이 있을 뿐. 그리고 이 중 가장 중요한 것은 돌봄이다. 돌본다는 것은 당신이 옷을 고르고, 고른 옷을 입고, 그 옷을 관리하는 것을 말한다”

라인 시대의 창조자이자 아름다움을 위해 불편한 코르셋과 페티코트를 다시 입게 만든 장본인 ‘크리스티앙 디오르’.

여자들의 하이힐에 대한 욕망과 눈물겨운 다이어트는 현대에 들어서 생긴 일시적 현상들이 아니다. 예부터 이어진 아름다워지기 위한 여성들의 노력의 중심에 우뚝 서 있는 그는 우아한 룩의 대명사로 현재까지도 많은 이들에게 사랑 받는 패션계의 거장으로 남아있다.

모든 여성들의 아름다움에 대한 욕망을 패션으로 대변해 준 크리스티앙 디오르. 향수, 화장품, 핸드백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아이템을 갖춘 토털 패션 시대를 구축하며 매력적인 아름다움을 선물하는 그에 대해 알아보자.

■ “열정이 없는 매력적인 아름다움은 없다”_크리스티앙 디오르


크리스티앙 디오르의 꿈은 디자이너가 아니었다. 풍부한 감성과 감각을 가진 그는 건축가를 꿈꾸었다. 하지만 여러 사건과 상황들은 그를 패션 디자인의 세계로 인도했다.

크리스티앙 디오르의 ‘뉴룩’의 창조는 아마 여성의 몸을 구조적으로 이해해 라인을 살려내려는 시도에서 오지 않았을까.

1905년 프랑스 그랑빌 출생으로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난 그는 부모님의 뜻에 따라 정치학도의 길로 들어선다. 하지만 뼛 속 깊이 예술가였던 탓에 예술가의 길을 포기하지 못하고 화랑을 경영하기 시작한다. 그러던 중 아버지의 사업이 큰 실패를 겪었고 형과 어머니가 잇따라 세상을 떠난다.

하루아침에 정신적으로 큰 충격을 받은 그는 1931년 패션 디자인의 스케치를 하며 패션계에 첫 발을 내딛는다.

그는 1938년 로베르 피게사에 들어가 지도를 받고 1941년 루시아 뤼통사에서 일하며 피에르 발망을 알게 된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1946년 ‘크리스챤 디올’을 오픈한다.

■ “참으로 새로운 룩이다”_카멜 스노우


모든 영감의 원천은 경험에서 나온다는 말이 있지 않던가. 그는 나중에 영감의 원천은 우아하고 세련된 어머니였다고 밝힌 바 있다.

여성의 몸매를 상품화한다는 비난에도 불구하고 최대 40마의 길이에 이르는 원단을 사용하며 사치와 아름다움을 동시에 선사한 디자이너 크리스티앙 디오르. 당시 그는 제2차 세계대전으로 투박한 옷에 신물이 나 있던 여성들에게 아름다운 허리라인을 되찾아 준 패션계의 혁명가고 평가된다.

그는 당시 뉴룩으로 인해 미국을 비롯한 세계에 명성을 떨쳤다. 후문에 따르면 전국민을 대상으로 의복배급제를 시행했을 정도의 심각한 재정난을 겪고 있었던 영국의 여왕인 엘리자베스 여왕과 동생 마가릿 공주를 위한 비공개 패션쇼까지 열었을 정도로.

또한 파리 패션계의 자존심으로 성장한 그는 파리 패션 대미 수출액의 75%, 1951년 프랑스 수익의 5%를 차지하는 것과 같은 위엄을 보이기도 했다.

뉴룩으로 이름을 날린 그는 10여년 동안 H, A, Y 그리고 펜슬 스커트와 같은 수많은 라인을 선보이며 라인의 시대를 개척한다.

어떤 패션가들은 그에게 ‘남성의 시각에서 바라본 지극히 페티시즘적인 디자이너’라는 비판을 가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가 죽은 지 50여년이 넘어가는 지금까지도 그만의 마니아 층을 형성하는 것을 보면 가혹한 평가가 아닐까.

■ “여인의 향수는 그녀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이야기 해준다”_크리스티앙 디오르


오트 꾸띄르에 입성하기 전부터 “아름답고 우아한 드레스에 어울리는 최고의 향을 만들고 싶다”던 그는 1947년 ‘퍼퓸 크리스찬 디올’을 설립하면서 ‘미스 디올’을 발표한다.

당시 사치품으로 여겨져 출시 첫해에는 200여 개밖에 팔리지 않았지만 그 다음에 뒤따른 향수들은 소비를 부추기기에 충분했다. 이를 시작으로 그는 립스틱 라인에 이어 1973년 토털 케어 라인까지 선보이며 코스메틱 시장에 발을 들여놓는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디올의 진정한 토털 패션의 시작은 그가 떠난 후인 1990년대 중반에 이르러 일어났다고 평가된다. 세계시장 공략을 직접진출 형태로 바꾸면서 부기존의 매장을 토털 부티크 형태의 전문점으로 바꾸면서 시작됐기 때문이다.

■ “나의 역할은 유혹하는 것이다”_존 갈리아노



스탈린과 간디처럼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다섯 사람들 중 한 명으로 꼽혔던 크리스티앙 디오르. 그가 죽은 후 그의 꾸띄르에는 이브 생 로랑, 마르크 보앙 등이 많은 디자이너들이 디올사를 거쳤지만 예전의 명성을 끌어올리기에는 충분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탈리아 패션계의 거장이자 지방시의 디자이너였던 존 갈리아노가 쟝 프랑코 페레에 이어 주임 디자이너로 임하면서 브랜드는 새로운 전성기를 맞이하게 된다.

프랑스를 대표하는 브랜드의 수석 디자이너가 어린 30대의 영국인이라니. 자존심이 강한 프랑스인들에게는 용납되지 않는 일이었지만 역사와 전통을 고수하면서도 창조를 반영하는 도전 정신과 열정에 그를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2011년 3월 개최된 그의 컬렉션은 고별 무대가 되었다. 인종 차별과 관련된 발언으로 수석 디자이너의 자리에서 해임된 것. 이후 개최된 2011-2012 FW 컬렉션은 그를 대신해 디자인팀 전원이 무대에 올라 피날레를 장식하기도 했다.

후에 디올은 질샌더의 수석 디자이너 라프 시몬스를 2012년 4월 디올의 아트디렉터로 임명한다. 화려한 우아함에 그만의 시크한 미니멀리즘을 대입시키며 조형적인 신선함을 불어넣고 있는 라프 시몬스. 지금 패션계는 앞으로 그가 가져올 디올의 행보에 이목을 집중시키고 있다. (사진출처: 크리스챤 디올 공식 홈페이지 캡처 및 영상 캡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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