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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바윗길을 가다(39) 설악산 노적봉 남동벽 '4인의 우정'길 / 그곳에 우리의 우정이 있었다

2014-09-25 16:2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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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률 기자] 설악산 노적봉 ‘4인의 우정길’을 등반하기로 한 8월26일 새벽, 설악동에는 보슬비가 부슬부슬 흩뿌렸다. 어제 오후부터 소나기가 여러 차례 쏟아졌는데 밤새 별 하나 보이지 않고 빗방울마저 떨어지고 있으니 과연 새벽 다섯 시에 설악동의 숙소를 떠나는 것이 좋을지 아니면 그냥 비를 긋고 있을지 제대로 가늠이 되지 않는 상태가 되었다.

이럴 때 바위꾼들에게 어울리는 지론이 하나 있다. "놀더라도 바위 밑에서 놀아라" 배낭을 단단히 챙겨 매고 설악산 소공원 주차장에 차를 세웠는데 간간히 내리던 빗방울이 모여 이제는 제법 큰 비를 뿌리고 있었다. 이런 날씨에 과연 등반을 제대로 할 수 있을 지 등반대원들은 자못 걱정 어린 모습들이 되었다.

주차장 입구에서 자판기 커피를 한잔 꺼내 마시니 아주 오래전 다방에서 마시던 커피의 향과 맛이 난다. 옛일을 추억하며 커피 한 잔을 마시고 비가 그치기를 기다려 어프로치를 시작한다. 이때 시각이 오전 6시경. 소공원 다리를 건너고 ‘한편의 시를 위한 길’ 진입로를 지나서 마지막 매점을 지나 비룡폭포로 발을 옮긴다. 소공원을 떠나 중간에 흐르는 계곡수에 세수를 하고 약 1시간 반 정도를 왔을까? 넉넉한 비박지 건너편에 ‘4인의 우정길’ 첫째 마디와 만날 수 있었다.

출발지점은 장비를 차고 등반을 준비하기에 무척 양호한 장소였다. 이곳에 서니 계곡 건너편으로 왼쪽부터 경원대길, 솜다리의 추억, 별 따는 소년들 길이 확연히 드러나 보였다. 그리고 그보다도 우렁차게 폭포수가 쏟아지는 토왕폭포의 모습은 마치 천상에서 물이 떨어지듯 신비하고 장엄하면서도 경외감을 느끼게 하는 모양새로 우리를 지켜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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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프로치 중간중간 흩뿌리던 비는 이때쯤 그치고 있었다. 이날 등반을 함께 한 거석산방(회장 허현자) 다섯 명의 클라이머들은 장쾌한 토왕폭의 기운을 받아서인지 활기찬 모습으로 출발 전 파이팅을 외쳤다. 선등은 윤재형 씨, 지하철 철도 기관사인 그는 5.11급의 등반실력을 가졌으며 남성적이면서도 항상 겸손한 자세에 배울 점이 많은 클라이머이다. 마흔이 넘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아직 미혼인 그는 그런 면에서 ‘준비된 총각’이기도 하다.

안전벨트에 캠과 퀵드로우, 슬링 등 등반장비를 차근차근 채운 재형 씨가 배낭을 조여매고 첫째 마디를 힘차게 선등한다. 사실 첫째 마디에서 다섯째 마디의 등반은 수월한 편이다. 홀드가 잘 발달되어 있어 서두르지 않고 차분하게 홀드를 찾아내면 즐거움이 배가 된다.

첫째 마디는 거리 20미터 난이도 5.7의 페이스 구간이다. 출발지점의 튀어나온 턱을 잘 짚고 넘어서면 양호한 홀드가 계속 나타난다. 차분하게 등반을 하며 올라가다보면 어느새 확보점이다. 빌레이를 보면서도 건너편 솜다리길과 별을 따는 소년들 길을 등반하는 클라이머들의 모습이 마치 색색깔의 헬멧을 쓴 개미처럼 바라다 보인다.

둘째 마디는 거리 37미터 난이도 5.8의 페이스와 크랙으로 이루어진 구간이다. 비교적 쉬운 아래부분은 오른쪽으로 길게 이동하다가 직상으로 올라붙는다. 직상구간이 끝나면 다시 확보점이 나타난다. 셋째 마디는 거리 35미터 난이도 5.7의 페이스, 침니, 슬랩이 골고루 포함된 바윗길이다. 확보점은 소나무에 걸린 여러 개의 슬링줄을 이용한다. 등반을 하면서 주변경관이 더 좋아진다. 변화무쌍한 날씨 덕에 시시각각으로 바뀌는 주변 풍광을 감상하는것도 즐거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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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째 마디는 거리 20미터 난이도 5.6의 쉬운 슬랩길이다. 확보점은 슬링을 걸기에 딱 좋은 형태의 암각이다. 다섯째 마디는 거리 35미터 난이도 5.8의 페이스 구간. 여기까지는 일반적인 리지길을 연상하면 될 정도로 등반에 부담이 없다. 등반보다는 주변으로 펼쳐진 황홀한 경치에 더 마음을 빼앗기게 된다.

다섯째 마디를 마치면 너른 테라스가 나온다. 이곳에서 잠시 쉬며 사방으로 파노라마처럼 펼쳐진 설악의 비경을 감상하는 것도 좋겠다. 안개가 살짝살짝 모습을 가리는 토왕폭의 절경은 변함이 없고 솜다리길과 별을 따는 소년들 길을 씩씩하게 등반하는 클라이머들을 찾아 보는 것도 재미있다.

다만 멀리 속초 앞바다 쪽으로는 구름 없이 맑은 하늘인데 영서 지방에서 흘러오는 구름은 잔뜩 찌푸리고 있어 등반팀은 발걸음을 재촉하며 남동벽 여섯째 마디를 향한다. 다섯째 마디 확보점에서 왼쪽으로 가다가 노적봉이 보이면 다시 오른쪽 아랫길로 접어들어 약 15분이나 걸어가야 한다. 암벽화보다는 리지화로 갈아 신는 것이 낫겠다.

자일을 둘러매고 등반보다 힘든 워킹길을 마치니 노적봉의 위용이 나타난다. 이제 가장 어렵다는 여섯째 마디. 다시 힘차게 출발하는 선등자. 그런데 아뿔싸, 선등자가 출발하여 세 개 쯤의 볼트에 퀵드로우를 걸었는데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선등자는 그 자리에 서서 비를 맞으며 기다리고 등반팀은 이 위기를 어떻게 넘겨야 할지 고민들이 얼굴에 묻어난다. 아무도 입에 올리지는 않고 있지만 비가 계속 쏟아진다면 이곳에서 탈출을 시도해야 할 것이다. 안 그래도 미끄러운 바위에서는 이제 본격적으로 물이 흐르기 시작한다. 선등자의 부담이 더욱 커지는 순간이다. 5.10a의 난이도를 가진 바윗길에 비가 이렇게 쏟아지면 난이도는 단번에 두세 등급이 올라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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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비가 5분 정도 내렸을까? 다행히 비가 그치면서 등반은 계속 이어진다. 선등자가 비교적 쉬운 초반의 볼트를 통과하고 크럭스 부분의 오버행 구간에 붙었다. 왼쪽 크랙을 잡고 넘어서 오르는 오버행 구간은 여섯째 마디 뿐 아니라 4인의 우정길에서의 하이라이트이자 백미라고 할 수 있다. 아마도 이 구간이 없다면 4인의 우정길은 다소 맥 빠진 길이 될 지도 모르겠다.

다행히 이 구간의 홀드는 비교적 뚜렷하다. 발 아래로 바라다 보이는 찌릿한 고도감만 잘 극복하면 평소 인공암장 5.10a급을 등반할 수 능력으로 충분히 선등이 가능하다. 다만 온통 물에 젖은 바위홀드를 잡고 슬립으로 인한 추락이 없이 선등을 하자니 이날 선등자의 가슴은 실로 착잡했을 것이다.

온사이트 등반이어서 정확한 루트를 모르는 선등자는 두 어 번의 텐션을 받고 등반로를 확인한 다음 크럭스를 돌파, 무사히 여섯째 마디의 등반을 완료했다. 선등을 하는 선등자나 그 모습을 지켜보는 후등자들이나 손에 땀이 나는 순간들이었다.

등반을 마치고 윤재형 씨는 “바위가 물에 젖어 멍텅구리성 홀드가 손에 잘 잡히지 않았습니다. 길을 잘 몰라서 하나하나 확인하며 등반하는데 추락시에는 부상의 위험도 있어서 적지 않게 긴장이 되었어요”라고 선등의 어려움을 털어 놓았다.

4인의 우정길은 2002년도에 송재용, 전용학, 김선영 씨 등이 개척한 고급 리지다. 산빛산악회 홈페이지에 가보면 4인의 우정길에 대한 전용학 씨의 설명과 함께 2002년도 11월호 월간 산에 게재된 산빛산악회 조은주 회원의 개척보고서를 살펴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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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용학 씨는 "여름 휴가 또는 가을 단풍 시즌에 등반하면 주변 경관과 함께 즐길 수 있어 좋을 것 같고 토왕골에서 시작하는 '4人의 우정길'과 '한편의 시를 위한 길'을 연계해서 등반하면(2인1조 하루) 3인 이상 일 경우 여유 있는 1박 2일의 멋진 코스가 될 거라 생각되며, 남동벽 초입(계곡)에서 여름 휴가를 보내면서 남벽 등반이나 남동벽 릿지 등반을 하면서 즐기는 것 또한 재미있을 거라 생각됩니다"라고 말하고 있다.

등반형태는 쉬운 슬랩과 크랙, 페이스와 오버행으로 이루어져 있다. 초입 계곡 우측벽에서 시작되는 첫째 마디는 거리 20m에 난이도 5.7 둘째마디는 거리 45m에 난이도 5.8 셋째 마디는 거리40m에 난이도 5.9이며 남동벽에서 시작되는 넷째 마디는 거리 45m에 난이도 5.10a 다섯째 마디는 거리 40m에 난이도 5.8 로 구분된다.

바윗길 소개글을 내용을 살펴보면 산빛악회가 처음 이 길을 개척했을 당시만 해도 4인의 우정길은 다섯 마디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소요장비로는 퀵드로가 6개 이상, 프렌드 1조가 필요하다. 중급 이상자는 릿지화로 전구간 등반이 가능하지만 선등자는 암벽화를 신는 것이 안전하며 남동벽의 두 마디는 의사소통이 어려우므로 오르기 전에 신호약속을 정하고 오를 것을 권고하고 있다.

그러나 산빛산악회의 개척보고서에도 '4인의 우정길'의 의미는 설명되지 않고 있었다. '4인의 우정길'이라는 이름은 어떻게 해서 지어졌을까? 분명히 중요한 의미가 담겨져 있다는 직감이 들었다. 이 길의 개척자인 전용학 씨로부터 직접 들어보자

"'4인의 우정길'의 의미는 당시 같은 산악회에서 활동하던 네 사람의 우정을 기념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네 명 모두 각자의 개성이 뚜렷한 분이라 전혀 서로 어울리기 어려울 거라고 생각했죠. 그러나 생각과는 달리 네 명은 산악회의 공식등반 이외에도 똘똘 뭉쳐 자유산행을 통해 지방의 리지등반을 다니며 즐거운 시간들을 보냈습니다"라고 말한다.

전용학 씨가 말하는 '전혀 서로 어울릴 것 같지 않은 4명의 당시 신상을 살펴보면, 서강대 신부님이면서 교수이신 심종혁 신부님, 위암수술로 위가 거의 없는 남극봉님, 산악회 내에서 등반경력이 가장 길고 성격이 까칠하지만 정확한 송재용 님, 대학 강단에서 강의를 하는 예쁜 조은주 님이다.

그는 "4인의 우정길은 제가 개척한 길 중에 가장 애착이 많이 가는 루트입니다"라며 "처음부터 끝까지 올라가면서 핸드 드릴로 직접 볼트를 설치하면서 개척했습니다"라고 개척 당시를 기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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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루트는 길 찾기가 쉽지 않았다고 한다. 개척 당시에 비하면 볼트의 수도 많이 늘어났다. 처음부터 확보물에 불투명한 루트를 자유등반하면서 개척하기는 쉽지 않다. 보통 루트 선을 긋고 위에서 내려오면서 개척하는 것이 대부분이다. 그래서 루트도 실수하지 않고 깨끗하게 만들 수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적벽의 루트 '2836'은 처음에 인공등반(A4)으로 개척했다가, 자유등반이 가능할 것 같아 위 앵커포인트에서 확보를 보며 자유등반이 가능하게 볼트의 위치를 정했다. 이후 이름이 '자유2836'으로 바뀌게 된 것이다. 전용학 씨는 '솜다리 추억'도 인공등반으로 오른 후 자유등반길로 개척했다. 그는 그 때의 감회를 이렇게 표현한다.

"개척당시에는 확보물이 불투명한 루트를 오르면서 개척한 것이라 마음의 부담도 있었지요. 하지만 당시 저에게 온 성취감은 다른 것에 비해 남달랐지요"

이제 등반은 마지막 일곱째 마디를 남겨놓고 있다. 별로 어렵지 않은 거리 35m 난이도 5.7의 페이스, 슬랩구간이다. 등반을 마치면 다시 사방으로 탁 트여진 노적봉 정상이 등반자를 반긴다.

하늘에서 떨어지는 토왕폭의 모습이 옅은 운무에 보였다 가려졌다를 거듭하면서 별따는 소년들 리지에서는 마치 별들이 우수수 떨어질 것도 같았다. 마치 우주 한 가운데에 놓여 있는 듯한 이 엄청난 풍광에 기자는 10년이 다 되어가는 구형 디지털카메라를 소토왕골로 던져버리고 싶었다. 신이 일부러 빚어놓은 듯 아름다운 설악의 진경을 도저히 카메라에 담을 수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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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상에서 소토왕골 방면으로 100여 미터를 클라이밍 다운 하면 하강 링이 설치되어 있다. 이 장소에서도 토왕폭의 멋진 경치와 울산바위를 조망할 수 있다. 이제 단 한 번의 30미터 하강을 하게 되면 그곳에서부터 소공원까지 걸어갈 수 있을 것이다. 소공원에 가면 시원한 냉면과 함께 오징어순대를 안주삼아 차디찬 맥주를 즐길 수도 있을 것이다.

2년여 전의 추락사고와 부상 그리고 이어진 재활을 통해 다시금 멋진 클라이머로 부활한 윤재형 씨의 완등에 기자의 마음도 마치 선등을 마친 것처럼 기분이 좋아졌다. 더욱이 여러 차례 비가 내리는 가운데 중도에서 포기하지 않고 침착하게 등반을 마친 그의 모습에서 다소 거창하기는 하지만 “인류의 역사는 도전과 응전의 역사”라는 아놀드 토인비의 명언이 다시금 떠올랐다.

4인의 우정길을 개척할 때에는 어려움도 많았다던데 개척자 네 사람은 아직도 변치 않는 우정을 간직하고 있을까? 이익이 없다 생각하면 하루사이에도 등을 돌리고 권력과 부를 좇아 부나비처럼 몰려드는 사람들과 달리 오로지 ‘바위’와 ‘우정’이라는 두 개의 주제를 가지고 살아온 그들의 우정이 변할 리는 없다고 굳게 믿어본다.

토왕폭은 오늘 등반을 함께 한 다섯 명의 등반팀이 첫째 마디 출발점에 발을 딛고 등반을 시작하던 순간부터 모든 어려움을 이겨내고 등반을 마치는 지금 이 순간까지 우렁차게 폭포수를 쏟아내며 우리들의 우정을 다시 한 번 격려하고 있었다. 그곳에 우리의 우정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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