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성률 기자] 도봉산 입구 포돌이 광장에서 거석산방 식구들과 만나 함께 선인으로 향한다. 한 시간여를 쉼 없이 오르다보니 유난히 화창한 날씨에 땀이 잔뜩 흐른다. 배낭을 내려놓고 큰 숨을 몰아쉬는데 그제서야 주변을 살펴보니 흰 단체 티셔츠를 입은 등반객들이 많이 눈에 뜨인다.
"오늘도 어느 등산학교의 졸업등반이 있겠구나"하고 물어보니 아니나 다를까 정승권 등산학교의 졸업등반이란다. 다시 살펴보니 정승권등산학교 정승권 교장이 보인다. 오래 전에 안면이 있던 차라 반갑게 인사를 나누었다. 동문의 단합과 등반열기가 대단해서 타 등산학교의 부러움을 사고 있는 정승권등산학교가 더욱 큰 발전을 통해 올바른 산악문화를 이끌어주기를 기대해본다.
표범길에서는 첫째 마디에서 선등연습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표범길 첫째마디는 표범길에서 가장 난이도가 높은 곳(5.10c)이어서 둘째 마디까지 등반연습 겸 피치등반을 하는 경우도 많다. 일행은 두 팀으로 나누어 표범길과 박쥐길 등반에 나선다.
표범길은 박쥐길과 더불어 선인봉을 대표하는 바윗길이다. 선인봉 남동면에 위치하고 있는 표범길의 왼쪽으로는 영길과 청악길이 있고 오른쪽으로 선암길과 박쥐길 그리고 동면으로 이어지면서 재원길과 만난다.
표범길은 모두 여섯 마디로 구성되어있다. 첫째 마디가 5.10c의 난이도로 전구간을 통털어 가장 어려운 축에 속하는데 첫째마디 출발지점이 5.10a, 펜둘럼 구간이 5.10c로 구분된다. 거리는 약 30미터. 둘째마디는 거리 23미터의 좌향크랙, 셋째 마디는 거리 20미터, 난이도 5.9의 실크랙과 슬랩구간, 넷째 마디는 거리 25미터의 난이도 5.7의 크랙구간이다. 넷째 마디를 마치면 10여 명이 편히 앉아 쉴 수 있는 테라스가 나온다. 대개의 경우 넷째마디를 끝내고 하강하는 경우가 많다. 다섯째 마디는 거리 약 40미터 난이도 5.6의 크랙구간이고 여섯째 마디는 거리 50미터 난이도 5.9의 슬랩구간이다. 마지막 지점에서는 출발장소인 첫째 마디로 하강한다.
첫째 마디는 출발이 만만치 않아 중간에 반드시 캠을 설치해야 한다. 추락시 발목부상을 입기 쉽기 때문이다. 출발이후에는 레이백 자세로 오르면 된다. 첫째 마디 뿐 아니라 표범길의 크럭스는 첫째 마디 끝부분에서 둘째마디로 넘어가는 구간이다. 개폐식으로 바뀐 링에 자일을 통과시킨 다음 줄을 잡고 내려와서 왼쪽으로 뛰어 넘어가는 펜듈럼 구간이다.
1960~70년대, 그 당시 우리의 산악 선배들은 어떻게 이런 바윗길을 낼 수 있었을까? 무한한 궁금증이 일어나는 대목이다.
셋째마디는 오른쪽 실크랙을 이용하여 등반한다. 난이도는 5.9이지만 표범길은 기존에 정해진 난이도와 상관없이 개인차에 따라 난이도의 높낮이가 심한 것이 특징이다. 다른 등반자에게 쉬운 길이 나에게는 한없이 어렵기도 하고 내게는 쉬운 길이 다른 등반자에게는 쉽게 느껴지는 것이다. 특히 표범길은 크랙에서 근력을 많이 사용하기 때문에 남성과 여성 등반자가 각각 느끼는 난이도의 차이가 크다.
넷째 마디는 벙어리성 크랙을 잡고 올라가는 구간이다. 크랙을 올라 스테밍 자세를 취하면서 양발을 서로 밀고 두 손 역시 바위를 밀면서 오르면 표범길의 첫 번째 볼트에 도달한다.
다섯째 마디는 슬랩 구간인데 넷째 마디의 두 번째 볼트에서 줄을 걸고 밑으로 내려와서 약간 줄에 의지하면서 왼 쪽으로 10시 방향으로 슬랩으로 오르면 턱에 올라서게 된다.

여섯째 마디는 난이도 5.9의 비교적 수월한 크랙 구간인데 역시 스테밍 자세를 취하고 양 옆을 밀면서 오르는 것이 편하다. 어느 한쪽 크랙만을 잡고 오르려다 보면 힘이 더 들고 발목에 상처를 입기 쉽다. 이 구간을 지나면 드디어 표범길의 종착역이자 하강포인트다. 수월해 보이는 난이도와 달리 만만치 않게 힘을 써야만 하는 표범길의 완등을 축하하는듯 시원한 전망이 펼쳐진다.
바위꾼들의 우정과 사랑이 싹트고 또 활짝 피어난 선인봉의 대표바윗길 표범길은 전통의 요델산악회가 개척했다. 요델산악회의 홈페이지에 가보면 요델의 정체성을 이렇게 표현해 놓았다. <요델산악회 (Alpine Club YODEL)는 1963년 5월 7일 도봉산 선인봉에서 전문암벽에 도전과 열정을 가지고 개척정신을 추구하며 창립된 산악회 입니다>
이 말은 곧 요델의 모산은 선인이며 선인봉을 중심으로 활동하겠다는 의지가 엿보인다. 요델산악회는 역시 1966년에 개척한 표범길 이외에도 선인봉의 양지길(1964), 허리길(1965), 만장봉 그림길(1968), 요델버트레스(1971), 막내길(1973) 등 선인에 큰 족적을 남겨 놓았다. 요델의 개척정신은 여기에 멈추지 않았다. 60년대 후반 설악산의 자즌바위골 개척 및 범봉 발굴 초등, 석주길 초등, 범봉연봉 초등, 칠형제봉 초등 등에 이어서 1974년에는 설악산 흑범길을 개척한 데 이어 1975년도에는 염라길(1975)을 개척하기에 이른다.
기자는 요델산악회 강구영 회장의 도움으로 표범길의 개척자인 백인섭 님으로부터 개척당시의 자료를 입수할 수 있었다.
* * *

1966년, 한 청년이 선인봉 전면벽의 박쥐길과 측면 사이의 빈 공간에 마음을 두기 시작했다. 서로 다른 두 가지 형태의 바위선이 비록 서로 동떨어져 있지만 멋진 모습으로 그의 눈을 매혹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첫째 선은 전면벽의 중앙 부위를 날개처럼 덮어 씌우고 있는 속 빈 바위, 그 오른쪽 끝자락 선은 박쥐길의 언더홀드가 되어 멋진 등반선을 이루고 있지만 왼쪽 끝자락 선은 더욱 멋진 선의 언더홀드 깜임에도 불구하고 위 아래가 끊겨서 등반선이 되지 못하고 그대로 방치되어 있는 것이 너무도 아쉬웠다. 둘째 선은 선인봉 전면 테라스에서 밑으로 한 20미터, 흡사 칼자국처럼 깊게 패인 크랙의 멋진 모습이었다. "저것을 어떻게 하면 바윗길로 만들 수 있을까?" 고민하던 그 청년의 이름은 백인섭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백인섭은 첫째 마디 크랙의 제일 윗부분에 하켄을 박고 줄을 건 다음 진자형 슬랩을 하면 손이 닿을만한 곳에 올라 설 수 있는 바위턱이 짧게 형성되어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그곳에서 위로 언더홀드가 시작되는 곳까지 잘하면 손가락이 들어갈 수도 있는 크랙이 정면에서는 보이지 않게 덮어 쓴 형태로 형성되어 있을 것 같은 느낌도 들었다. 그곳에 하켄 한 두 개만 치면 언더 홀드까지 레이백 동작으로 오를 수 있을 것 같았다. 첫 번째 문제인 첫째 마디치와 두 번째 마디의 연결이 해결된 것이다.
그러나 가장 어려운 문제는 수직선 방향으로 레이백 또는 크랙 등반으로 끝까지 올라서 언더홀드가 시작되는 지점에서 어떻게 자세를 바꿀 수 있을 것인가는 여전히 감감했다. 도무지 해답이 떠오르지를 않았다. 그 지점에 조그만 스탠스가 있어서 잠시 몸의 중립을 취할 수 만 있다면 가능할 터이지만 그것은 백인섭의 기대일 뿐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백인섭은 갑자기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바로 그 지점에 그가 기대하는 스탠스가 실제로 마련되어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허리길 구멍 홀드처럼. 그렇다면 표범길은 가능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어 일단 개척의 첫발을 떼기로 마음 먹은 것이다.

백인섭은 이희구, 강길건, 조상규와 함께 표범길 첫째 마디를 오르기 시작했다. 출발점에 얇은 리스 하켄을 하나 박고 사다리를 걸어야 했다. 그런데 하켄을 박기 위해 해머를 내리치는 순간 해머의 나무자루 목이 부러져서 밑으로 나뒹굴었다. 불길한 징조 같았지만 백인섭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 길조라고 여겼다. 등반중에 이런 일이 생겼더라면 후등자가 다칠 수도 있고 작업도 어렵겠지만 밑에서 이런 일이 생겼기 때문에 천만다행이라는 생각을 한 것이었다. 발상의 전환이었다.
첫째마디부터 쉽지 않은 몸동작으로 첫 번째 난관을 통과해서 4미터 위 나무가 있는 턱에 올라섰다. 그곳에서 위로 쭉 뻗은 크랙은 레이백이 가능한 멋진 크랙이었지만 흙으로 꽉차있어 손가락으로 후벼 파느라 손가락이 피투성이가 되었다.
다음 주에 다시 먼저 진출점까지 진출한 일행은 첫째 마디 끝부분에 튼튼한 확보하켄을 설치하고 그 줄에 몸을 밖으로 최대한 빼서 언더홀드의 가능성을 찾아보았다. 고개를 길게 뽑고 쳐다보는 순간 석양의 햇빛을 받아 보석처럼 빛나는 스탠스가 바로 거기에 있었다. 백인섭의 막연하지만 간절했던 기대가 바로 그 자리에 그 모습으로 그 만큼만 현실로 나타나는 경이로운 순간이었다. 바로 표범길의 두 번째 장벽인 둘째 마디인 언더홀드 구간의 가능성이 입증되는 순간이었다. 백인섭은 전율까지 느꼈던 그 순간의 기쁨을 마음 속 깊은 곳에 묻어두고 바로 다음 등반을 계속했다. 확보하켄에 몸을 의지하고 조금 내려와서 진자운동을 통해서 왼쪽 바위 턱을 잡고 올라서는 동작이었다. 서너 번 시도 끝에 드디어 왼 손에 턱이 잡혔다.

선인봉에서 가장 인기 있는 바윗길 표범길의 첫째 마디와 둘째 마디를 잇는 구간이 완성되는 순간이었다.
둘째 마디의 중간 지점에 도달해 보니 기대했던 스탠스가 기대이상으로 완벽한 형태였고 튼튼한 상태였고 더욱 놀라운 것은 확보용 하켄을 박을 수 있는 완벽한 리스가 적절한 높이에서 딱 필요한 만큼 만 뚜껑바위 속에서 밖으로 나와 형성되어 있었던 것이다.
백인섭은 스탠스만을 기대하고 바랐는데 선인 신령께서 확보하켄을 위한 리스까지 그것도 가장 바람직한 수평 방향으로 장만해 놓았던 것이라 생각했다. 그 부분은 바위의 재질까지도 거의 철광석 수준으로 되어 있어 박힌 하켄의 안전성은 완벽 그 자체였다. 든든한 확보점 덕에 위험한 언더홀드 구간을 마음 놓고 공략할 수가 있었다.
그러나 뜻밖의 난관에 부딫치게 되었다. 언더홀드 중간에 주걱처럼 생긴 부분이 썩은 바위라서 잡으면 떨어져 나올 판이라 전진이 불가능했다. 유일한 해결책은 대형 봉봉하켄을 언더홀드 속에 설치하면서 주걱홀드를 넘어서는 것이다. 마침 당시 고대 산악부 OB인 장영환 선배가 대형 봉봉하켄을 몇 개 갖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후배 홍종만을 시켜서 빌려오도록 해서 그 위험한 구간을 개척해 나갔다.

셋째 마디에서는 목숨이 걸린 위험한 상황을 맞기도 했다. 볼트작업을 하던중 사다리를 걸고 서있는 앵글 하켄이 몸무게를 버티지 못하고 밀리기 시작한 것이었다. 결국 하켄이 쑥 빠지면서 백인섭의 몸에 주렁주렁 매달려 있던 하켄이며 사다리, 등이 바위에 부딪히면서 요란한 쇳소리를 내면서 미끄러져 떨어지고 말았다. 어찌된 영문인지 20미터를 떨어지는데도 제동이 안되고 세컨의 옆까지 지나가고 있었다. 백인섭은 빌레이어에게 비명을 질렀고 그제서야 한눈을 팔고 있던 빌레이어가 황급히 줄을 잡았지만 제동은 되지 않았다. 결국 백인섭은 움푹 패인 바위 속에서 신발창 제동에 의해 멈춰섰다.
아찔한 상황이었다. 그때 제동이 되지 않았다면 바위면의 경사는 수직으로 바뀌면서 세컨이 확보하고 있는 하켄도 빠져버렸을 것이고 거의 모든 등반자가 추락사했을 것이다. 그랬다면 오늘날 표범길은 단순한 등반선 이외에 아무런 구실을 하지 못했을 지도 모른다. 이렇게 표범길 개척의 최대 고비가 지나갔다.

다음 고비는 넷째 마디였다. 셋째 마디가 끝나는 부분에서 11시 방향으로 올라가야 하는데 크랙은 전혀 없는 페이스 구간이었다. 과연 그곳을 오를 수 있을 것인가? 그해 겨울 백인섭은 눈이 내린 날 선인봉을 찾아 등반선을 살폈다. 등반선의 사면에 하얀 눈이 이어지면서 크랙밑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것은 급사면이지만 부분부분에 슬랩이 가능한 사면이 발자국처럼 산발적으로 형성되어 있음을 말해주는 것이었다.
다음해인 1967년 봄 백인섭과 일행은 드디어 1년여의 노력 끝에 표범길을 개척하는데 성공했다. 당시에는 그 누구도 등반선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한 길, 백인섭과 동료들은 그 바위선을 교묘하게 엮어 또 하나의 바윗길을 만들어냈다. 그리고 그들은 바로 전해 전방에서 ROTC로 근무하다가 사망한 악우 조상규를 영원히 기억하고자 새로 개척한 길에 그의 별명인 표범길이라 이름 붙였다. 당시에는 그 표범길이 45년 가까이 선인에서 가장 인기 있는 바윗길이 되어 산악인들의 사랑을 받을 줄은 미처 예상치 못했을 것이다.
* * *

요델산악회 강구영 회장(한국산악회 기획이사 / 한국외국어대학교 환경학과 교수)은 "표범길을 올라 본 산악인들이나 표범길 등반선의 아름다움을 느낀 산악인들이 이 길의 개척사를 읽어본다면 충분히 공감을 하리라 생각합니다. 기존에 나 있는 바윗길에 사전에 허락도 없기 무자비하게 볼트를 박아버리는 산악인들에게는 깊은 생각을 하게 해 줄 것입니다" 라고 말한다.
"요델산악회의 전통을 이어줄 후배들이 없는 것이 아쉽다"는 강 회장은 또 "표범길 개척보고회가 요델산악회의 창립일이니만큼 5월에 표범길에 대한 기사가 나간다는 것은 뜻깊은 일"이라며 "옛 선배들이 추구하던 등반에 대해서 한번쯤 생각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1960년대, 당시 이 땅의 등반사를 새로 쓰기 시작하며 선인을 누비던 젊은 청년들의 기개와 요델의 바위혼이 그대로 녹아있는 바윗길 표범길. 표범길은 이제 선인을 굳게 지키는 표범이 되어 산악인의 혼을 일깨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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