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무를 조금 더 거칠게 썰고, 그릇에는 힘껏 던져 넣는다. 말을 거는 사람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는다. ‘동백꽃 필 무렵’에서 헬레나를 연기한 카슨이 첫 등장 장면을 준비하며 떠올린 행동이다. 대사는 많지 않았다. 그래서 무엇을 말할지 못지않게 어떻게 움직일지가 중요했다.
그가 생각한 헬레나는 꾸밈없고 거침없는 시골 아가씨였다. 외모에도 변화를 줬다. 한국에서 아르바이트하는 여성들의 머리 모양을 눈여겨본 뒤, 생애 처음으로 앞머리를 잘랐다. 얼굴을 둘러싼 머리카락부터 표정과 몸짓까지 조금씩 바꾸며 헬레나에게 다가갔다.
그 인물만큼 오래 남은 것은 촬영장의 사람들이다. 당시 카슨에게는 매니저나 스타일리스트처럼 현장을 함께 다니며 도와주는 팀이 없었다. 고두심과 그의 팀은 식사 때마다 카슨을 불렀다. 혼자 밥을 먹지 않도록 곁에 자리를 내줬고, 커피나 차를 사러 갈 때면 카슨의 몫도 챙겼다.
거창한 말보다 식사 한 번, 음료 한 잔에 담긴 배려가 힘이 됐다. 선배들은 그를 딸이나 여동생, 친구처럼 대했다. 차영훈 감독의 다정함도 기억에 남아 있다. 카슨이 ‘동백꽃 필 무렵’을 가족 같은 현장으로 떠올리는 이유다. 인물을 만들기 위해 애쓴 시간 곁에는 자신을 반갑게 맞아준 사람들이 있었다.
배우의 길이 늘 그만큼 따뜻했던 것은 아니다. 넷플릭스 시리즈 ‘내일 지구가 망해버렸으면 좋겠어’의 오디션 제안을 받기 불과 몇 달 전, 그는 연기를 완전히 그만둘지 진지하게 고민했다. 오랫동안 공부하고 훈련했지만 계속해도 되는지 확신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이 오디션은 놓치고 싶지 않았다.

새로운 배역의 이름도 카슨이었다. 한국 시트콤에서 배우의 이름을 인물에게 쓰던 방식을 잇는다는 점이 처음에는 영광스러웠다. 막상 연기를 시작하니 예상하지 못한 어려움이 생겼다. 현장에서 누군가 카슨을 부를 때마다, 실제 자신이 아니라 같은 얼굴과 이름을 가진 가상의 인물을 부른다는 사실을 의식해야 했다.
인물은 그렇게 행동하지 않을 것 같다는 피드백을 받으면 속으로 자신은 그렇게 하는데 싶기도 했다. 반대의 경우도 있었다. 이름이 같아 더 쉬울 것 같았던 연기는 오히려 자신과 인물을 구분하는 연습이 됐다.
극 중 카슨은 충동적이고 대담하며 목소리도 크다. 정리정돈에는 서툴고 화도 쉽게 낸다. 실제 카슨은 계획을 세우고 꼼꼼하게 일을 처리하는 편이다. 친구를 소중히 여기고 아끼는 사람을 지키려는 마음은 닮았지만, 그 밖의 많은 부분은 달랐다. 자신의 평소 성격에 기대어 연기할 수 없었다.
작품은 우정도 남겼다. 출연진이 처음 모여 서로를 알아가던 날을 그는 아직 기억한다. 테리스와 요아, 민니, 영자는 지금도 소중한 사람들이다. 카슨에게 이 시리즈는 경력의 전환점인 동시에 오래 이어갈 관계를 만난 작품이다. 합격 소식의 기쁨 뒤로 함께 시간을 보낸 얼굴들이 남았다.
새 대본을 받으면 그가 먼저 살피는 것도 관계다. 인물 주변에 누가 있는지, 서로 어떤 과거를 나눴는지 생각한다. 대본에 적히지 않은 시간까지 상상하며 그 관계에서 생겼을 감정을 느껴보려 한다. 배우끼리는 처음 만났어도 인물끼리는 오랜 시간을 함께 살아왔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 과정을 거치면 대본 속 인물이 장면을 위해 잠시 등장하는 존재에서 삶을 살아온 사람으로 다가온다. 누구를 사랑하고 누구에게 화가 나는지, 왜 지금 같은 선택을 하는지도 구체적이 된다. 등장하는 시간이 짧아도 카슨이 준비하는 인물의 시간까지 짧은 것은 아니다.
그 준비를 보여줄 기회가 충분하다고 느끼는 것은 아니다. 카슨은 외국인 여성 배우에게 주어지는 역할의 폭이 더 넓어졌으면 한다고 말했다. 군인과 경찰, 악역처럼 다양한 인물에도 도전하고 싶다. 선생님이나 엄마, 친구를 연기할 때조차 인물보다 외적인 조건이 앞서는 듯해 아쉬웠던 순간도 있었다고 털어놨다.
그가 바라는 것은 복잡하고 불완전한 사람들을 있는 그대로 표현할 기회다. 관객도 여러 모습의 사람들을 만날 수 있기를 바란다. 그 안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계속 훈련하고, 주어진 역할을 깊이 있게 준비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더 다양한 배역을 기다리는 동안에도 눈앞의 인물을 소홀히 할 수는 없다.

다시 촬영할 때마다 감독은 미안해했다. 당시에는 정신이 없었지만, 이제는 웃으며 이야기하는 기억이다. 전신 슈트를 입은 채 거대한 언덕을 몇 번이고 구르는 일은 영화가 아니었다면 좀처럼 경험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겨울 추가 촬영에서는 여러 배우가 번갈아 뭉치 슈트를 입었다. 카슨이 맡은 장면 중 하나는 뭉치가 퇴근한 뒤 집에서 TV를 보는 순간이었다. 자신이 지하철에서 벌인 소동이 뉴스에 나오고, 이어지는 화면과 메시지가 불안을 키운다. 화가 난 뭉치는 리모컨을 던진다.
감독은 리모컨이 부서질 만큼 세게 던지면 좋겠다고 했다. 카슨이 힘껏 던진 리모컨은 실제로 조금 망가졌다. 완성된 영화를 볼 때 그 장면이 유독 특별한 이유다. 관객은 슈트 안의 배우를 알아보지 못할 수 있지만, 카슨은 그 안에서 자신이 만들어낸 움직임을 안다.
‘뭉치’는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에서 한국 단편 작품상을 받았다. 카슨에게는 자신이 출연한 작품으로 영화제 레드카펫을 밟고 수상의 기쁨까지 나눈 첫 경험이었다. 감독과 배우, 스태프가 작품에 쏟은 애정이 인정받았다는 사실이 자랑스러웠다.
기쁨 곁에는 함께 기억해야 할 사람도 있었다. 카슨은 영화의 색보정을 맡았던 스태프가 세상을 떠났고, 상영 행사에서 감독이 그를 기리는 말을 전했다고 회상했다. 작품을 완성하는 데 힘을 보탠 사람을 모두 함께 떠올린 시간이었다. 수상은 결과뿐 아니라 그 결과에 닿기까지의 사람들을 기억하게 했다.
무를 써는 손짓, 자신과 이름이 같은 인물의 엉뚱함, 얼굴을 가린 슈트 안의 움직임까지. 카슨은 서로 다른 방식으로 장면에 자신의 몫을 보탰다. 그가 만들어온 자리는 한 번의 캐스팅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짧은 등장에도 인물의 성격을 담으려던 고민과, 함께 일한 사람들에게 받은 마음이 그 안에 쌓여 있다.
김민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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