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란이 호르무즈 해협에서 민간 선박을 잇따라 공격하며 배럴당 200달러 유가를 경고하고 나선 가운데, 국제에너지기구(IEA)가 역사상 최대 규모인 4억 배럴의 전략 비축유 방출을 결정했다.
이슬람혁명수비대(IRGC) 역시 미국·이스라엘 또는 그 동맹국과 연계된 선박은 ‘합법적인 공격 대상’이라고 선포하며 호르무즈 해협을 통한 원유 수송을 전면 불허하겠다는 입장을 재확인했다.
이날 새벽 아랍에미리트(UAE) 항구를 출발한 태국 운송업체 프레셔스 쉬핑 소속 화물선 ‘마유리 나리호’가 호르무즈 해협을 통과하다 IRGC의 공격을 받았다.
인근 페르시아만에서는 일본 화물선 ‘원 마제스티호’, 마셜제도 국적 벌크선 ‘스타 그위네스호’, 이스라엘 화물선 ‘엑스프레스룸호’도 피해를 입었다. 전쟁 발발 이후 피격 선박 수는 이로써 15척으로 늘었다.
졸파카리 대변인은 한발 더 나아가 “미국·이스라엘과 거래하는 은행들을 공격해 보복할 것”이라며 “중동 전역에서 은행으로부터 1㎞ 이상 떨어져 있어야 안전할 것”이라고 위협했다.
유가 급등세에 국제사회는 긴급 진화에 나섰다. IEA는 11일 32개 회원국의 만장일치로 4억 배럴의 전략 비축유를 방출하기로 결정했다. 이는 IEA 역사상 6번째 비축유 방출이자 물량 기준으로는 역대 최대 규모다. 2022년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당시 두 차례에 걸쳐 방출한 1억8,270만 배럴의 두 배를 웃도는 수준이다.
파티 비롤 IEA 사무총장은 파리 본부에서 발표를 통해 “이번 조치는 시장 혼란의 즉각적 영향을 완화하기 위한 중대한 행동”이라면서도 “유가 안정을 위한 가장 근본적인 해법은 호르무즈 해협을 통한 원유 수송 재개”라고 강조했다. 카테리나 라이헤 독일 경제장관은 미국과 일본이 방출 물량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할 것이라고 밝혔다.
일본은 IEA 공조와 별도로 오는 16일부터 민간 비축유 15일분과 국가 비축유 1개월분 이상을 선제적으로 방출할 계획이다. 다카이치 사나에 일본 총리는 “일본은 석유 수입의 약 70%를 호르무즈 해협에 의존하고 있다”며 방출 배경을 설명했다.
다만 이번에 방출될 4억 배럴은 호르무즈 해협을 통과하는 원유량의 3주치 분량에 불과해 근본적인 해결책과는 거리가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코펜하겐대 크리스티안 뷔거 교수는 “호르무즈 해협이 재개통되지 않으면 유럽은 심각한 에너지 공급 위기에 직면할 것”이라며 “해운업계는 현재 사실상 해협 통과가 불가능한 상황”이라고 경고했다.
영국 가디언은 이란 원유 수출의 90%가 통과하는 카르그(Kharg) 섬 원유 터미널이 미국과 이스라엘의 잠재적 공격 목표로 거론되고 있다고 보도했다. 채텀하우스의 닐 퀼리엄 연구원은 “카르그가 공격받는다면 유가는 월요일에 기록한 배럴당 120달러에서 150달러까지 치솟을 수 있다”고 전망했다. 그러나 카르그 섬을 장악하더라도 이란은 원유를 생산만 하고 수출하지 못하고, 미국은 그 원유를 생산하지 못하는 교착 상태에 빠질 수 있다는 반론도 만만치 않다.
이스라엘은 지난 주말 이란의 정유소 2곳과 유류 저장소 2곳을 공습해 수도 테헤란을 짙은 연기로 뒤덮었지만, 이후 추가 공격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미국은 이란 내 5,000개 이상의 목표물을 타격하면서도 석유 인프라에는 아직 손대지 않고 있다.
미·이란 전쟁과 호르무즈 해협 봉쇄로 고유가 국면이 이어지는 가운데, 중남미가 경제적·지정학적 측면에서 반사 이익을 누릴 수 있다는 분석이 제기됐다. 아르헨티나 매체 인포바에는 골드만삭스 보고서를 인용해 에너지 순수출국이 많은 중남미 지역 구조가 고유가 장기화 국면에서 강점으로 작용할 수 있다고 보도했다.
브라질, 가이아나, 콜롬비아 등 주요 산유국은 수출 증가와 외화 유입 확대 효과를 동시에 누릴 것으로 예상된다. 반면 에너지 수입 의존도가 높은 멕시코와 칠레 등은 혜택이 상대적으로 제한될 수 있지만, 전체적으로는 원자재 가격 상승이 지역 경제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전망이다. 특히 과거 금융 불안 시기마다 타격을 받았던 아르헨티나도 최근 에너지 순수출국으로 전환하면서 유가 상승의 수혜국 대열에 합류할 가능성이 크다는 분석이다.
중남미의 또 다른 강점은 지정학적 안정성이다. 중동과 유럽에서 군사 충돌이 이어지는 상황에서 중남미는 비교적 평화로운 지역으로 평가받고 있어 글로벌 기업과 투자자들에게 안정적인 생산·투자 거점으로 부각되고 있다. 다만 전문가들은 이러한 기회를 실질적인 성장으로 연결하려면 역내 협력 강화와 실용적 외교 전략이 병행돼야 한다고 강조한다.
국내에서도 유가 폭등의 여파가 가시화되고 있다. 경상남도는 10일부터 ‘민생 안정 특별기간’에 돌입하고 가용한 행정·재정 수단을 총동원해 도민 경제 피해를 최소화한다는 방침이다.
우선 기존 예산에 편성된 복지예산 6조112억 원을 조기 집행하기로 했다. 취약계층과 저소득층에 유가 충격이 가장 먼저 집중되는 만큼 선제 지원에 나서겠다는 것이다. 운송·배달 업종 등 육상 운송 소상공인을 위한 긴급경영안정자금 50억 원도 이달 중 신속 지원할 방침이다. 호르무즈 해협 통과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중소 수출업체를 위해서는 물류비 3억 원을 추경으로 긴급 편성할 계획이다. 한국무역협회 경남지역본부에 따르면 경남 기업 28개사 이상의 물품을 실은 선박이 호르무즈 해협을 통과하지 못하거나 목적지에서 하역하지 못해 물류 차질을 빚고 있다.
박완수 경남도지사는 “중소기업 육성자금 2,800억 원을 즉시 지원해 물류비와 중소기업의 경영난을 덜겠다”며 “사태가 장기화될 경우 예비비 100억 원을 추가 투입하는 등 상황을 면밀히 점검해 대응하겠다”고 밝혔다. 경남도는 농협과 연계해 농업용 면세유 300억 원 규모의 할인도 긴급 지원하기로 했으며, 지역 주유소 1,008곳을 대상으로 가격 담합·매점매석 등 불법 행위 단속도 강화한다.
한편 유가가 단기간에 10~20% 급등하자 정부 역시 전략 비축유 방출 카드를 검토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이번 주 발표 예정인 석유 최고가격제와 맞물려 국내 유가 안정에 실질적인 효과를 발휘할 것으로 기대된다.
미국과 이란 간 전쟁이 이어지며 전 세계가 수십 년 만에 최악의 에너지 위기를 맞이하고 있다. 호르무즈 해협 봉쇄라는 구조적 문제가 해소되지 않는 한 비축유 방출만으로는 한계가 있다는 지적이 이어지는 가운데, 국제사회의 외교적 해법 마련이 어느 때보다 시급한 상황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