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근길 교차로에서 커다란 모터사이클을 종종 마주친다. 헬멧과 가죽 재킷, 묵직한 배기음 등의 정보는 젊은 남자 얼굴을 떠올리게 한다. 그런데 50대, 60대의 중년이다.
우리는 꿈을 청소년기의 전유물로 여긴다. 정년을 앞둔 50·60대에게는 좀처럼 묻지 않는다. 그러나 100세 시대를 사는 지금, 예순 즈음의 사람들은 인생의 후반전을 앞두고 다시 고민에 빠진다. ‘앞으로 40년을 나는 뭘 하며 살까’
이 질문에서 출발해 나는 〈내숭: 당신의 무지개는 어디에 있습니까?〉를 그렸다. 겉으로는 조신한 한복 차림의 내숭녀를, 속으로는 엔진의 굉음을 즐기는 ‘어른아이’로 세상 한가운데 세워 보고 싶었다.
화면 한가운데, 붉은색 저고리를 입은 여인이 거대한 모터사이클에 올라타 있다. 전통혼례의 신부를 연상시키는 적색은 화면을 장악하며 뜨겁게 타오른다. 그 아래로는 금속성 광택을 뿜어내는 검은 차체가 묵직하게 버티고 있다. 반투명한 치마의 회색빛과 가죽 가방의 베이지색이 그 사이를 메우며, 정적인 전통 의상과 역동적인 기계 문명 사이의 충돌을 극대화한다. 조용해야 할 한복의 세계가, 요란한 배기음을 내는 엔진 위에서 흔들리고 있는 장면이다.
이때 흰 여백으로 남겨진 배경은 단지 ‘비어 있는’ 공간이 아니다. 관객의 시선을 조금만 옮겨 오토바이의 사이드 미러를 들여다보면, 그 속에는 불빛 가득한 저녁 풍경이 반짝이고 있다. 동양화 특유의 여백은 거울을 통해 도시의 야경으로 확장된다. 작은 직사각형 안에 압축된 건물과 자동차의 불빛은, 화면 밖에 존재하는 소란스러운 밤거리를 암시한다. 하얀 여백을 상상 속 풍경으로 가득 채운다. 고요한 종이 위에, 거울이라는 작은 창을 통해 현대 도시의 소음과 속도가 흘러든다.
여인의 표정은 제목처럼 ‘내숭’스럽다. 살짝 고개를 돌려 뒤를 흘깃 돌아보는 시선에는 수줍음과 도발, 그리고 들킬까 봐 조심스러운 긴장이 동시에 담겨 있다. 하지만 그녀가 올라탄 오토바이는 ‘SHY GIRL’이라는 번호판을 달고 있다. 스스로를 수줍은 소녀라 부르면서, 누구보다 요란하고 남성적인 기계 위에 올라탄 이 아이러니가 곧 작품의 핵심이다. 겉으로는 조신한 척하지만 속으로는 대담한 일탈을 꿈꾸는 한국인의 ‘내숭’을 유쾌하게 꼬집는다.

여기서 할리데이비슨은 단순한 이동 수단이 아니다. 세계적으로 ‘러브마크’라 불릴 만큼 강력한 팬덤을 지닌 이 모터사이클은, 많은 중년에게 청춘의 상징이자 미완의 로망이다. 젊은 시절, 등록금과 월세, 아이들 학원비에 밀려 늘 뒤로 밀렸던 ‘나만을 위한 장난감’. 사회적 지위와 가족의 책임을 짊어진 채 오랫동안 미뤄두었던 욕망이 은퇴를 앞두고 다시 배기음을 높인다. 나는 이 지점을 ‘무지개’에 비유하고 싶었다. 비가 그친 뒤 잠깐 떠올랐다 사라지는, 손에 잡히지 않는 일곱 빛깔의 곡선. 어릴 적 누구나 한 번쯤 쫓아가 보지만, 자라면서 현실이라는 구름 속에 묻어둔 채 잊어버리는 것. 그 무지개가, 삶의 어느 지점에서 다시 불쑥 우리를 부른다.
한국 사회는 젊은이들에게도, 중년에게도 모순된 요구를 한다. 10대와 20대에게는 “꿈을 가져라”라고 말하면서 동시에 “현실을 보라”라고 다그친다. 취업, 스펙, 내 집 마련, 안정적인 직장. 이 모든 것을 계산하다 보면 정작 ‘무지개’는 이력서 한구석에 접어 넣은 낙서처럼 느껴진다. 꿈을 말하는 것조차 눈치가 보이는 시대, 우리는 너무 일찍 어른이 되어 버린다.
그 사이 부모 세대는 어느새 정년을 앞두고 있다. 회사 명함을 반납해야 할 나이가 되어서야 비로소 자신에게 되묻게 된다. ‘나는 회사 말고, 직함 말고, 누군가의 부모라는 역할 말고, 도대체 누구였지? 무엇을 좋아하는 사람이었지?’ 뒤늦게 자신을 향한 질문을 시작한 중년의 뒤통수에, 나는 한복 입은 ‘SHY GIRL’을 포개어 보았다.
〈내숭: 당신의 무지개는 어디에 있습니까?〉라는 제목은 관객에게 건네는 직접적인 질문이다. 이 작품 앞에 선 10대 관객은 여인의 눈빛보다 거대한 오토바이에 먼저 시선을 빼앗길지도 모른다. “와, 나도 저런 거 타 보고 싶다”는 설렘과 함께. 반대로 50·60대 관객은 번호판의 글자보다, 뒤뚱거리며 돌아앉은 자세에서 낯선 기시감을 느낄 수 있다. 오래전 마음속에 숨겨 두었던 장난기, 청춘의 직선 도로 위를 달리던 그날의 속도가 문득 떠오를지도 모른다. 그렇게 이 그림은 세대를 가르는 대신, 서로 다른 세대의 불안을 한 화면 위에 포개어 놓는다. 미래가 막막한 청년의 고민도, 남은 인생이 막막한 중년의 고민도 결국 같은 질문으로 수렴된다. ‘나는 지금, 무엇을 향해 어디로 달리고 있는가’
나는 이 작품으로 말하고 싶었다. 꿈에 대한 고민은 10대, 20대에만 허용된 특권이 아니라고. 100세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30대에도, 50대에도, 70대에도 계속 던져도 되는 질문이라고. 그리고 중년에게는 이렇게 속삭이고 싶다. “당신의 무지개는 이미 늦어버린 것이 아니라, 이제야 비로소 색을 띠고 나타난 것일지도 모른다”고. 비가 그치고 나서야 무지개가 뜨듯, 삶의 폭풍우를 견딘 뒤에야 비로소 보이는 길이 있다. 설령 그 무지개가 남들이 보기엔 유치한 장난감일지라도, 그 배기음이 다시 한 번 당신의 심장을 뛰게 만든다면, 지금 달리고 있는 바로 그 길이 당신의 무지개다.
글_김현정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