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합

곗돈과 계주…계 모임의 함정

전종헌 기자
2025-12-18 16:4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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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 모임 : 계 뜻, 계 형태, 계 종류, 계 목돈 등 화제…가락시장 40년 계모임 계주, 곗돈 횡령 잠적 사건

서울 가락시장에서 40년 전통의 계 모임을 운영하던 계주가 곗돈 15억 원을 들고 잠적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2025년 연말, 서울 가락동 농수산물도매시장이 충격에 휩싸였다. 40년 전통을 자랑하던 상인 계모임의 계주가 거액의 곗돈을 들고 잠적했기 때문이다. 서울 송파경찰서에 접수된 고소장만 40여 건, 확인된 피해액은 15억 원이다.

김영찬 태승상회 대표는 라디오 인터뷰를 통해 미신고 피해자까지 포함할 경우 총피해 규모가 30억 원에 육박할 것이라 전망했다. 피해자 100여 명은 결혼 자금, 전세금, 노후 자금을 잃고 망연자실했다. 형법상 계주가 곗돈을 가지고 잠적할 경우 단순 사기죄뿐만 아니라 업무상 횡령 및 배임 혐의가 적용될 수 있으며, 피해 액수가 5억 원을 넘으면 특정경제범죄 가중처벌 등에 관한 법률에 따라 가중 처벌을 받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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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 뜻, 계 형태, 계 종류, 계 목돈…가락시장 40년 계 모임 계주, 곗돈 횡령 잠적 사건

2025년 한 해 동안 유사한 사건은 전국에서 반복됐다. 1월 광양 8억 원, 9월 부산 20억 원, 11월 농아인 대상 10억 원대 곗돈 사기 사건이 연달아 터졌다. 제도권 금융이 발달했음에도 전통시장과 자영업 현장에서 계는 여전히 작동한다. 복잡한 대출 심사 없이 신용만으로 목돈을 융통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시중은행 적금 금리가 연 3~4% 수준인 데 반해, 낙찰계의 실질 수익률은 연 10~20%를 상회하는 경우가 많아 고위험을 감수하고서라도 고수익을 쫓는 심리가 계모임 가입을 부추기는 주요 원인으로 작용한다.

계는 조선 후기 마을 공동체 부조 활동에서 시작됐다. 혼례나 장례 비용을 마련하던 관습은 근대화를 거치며 상인과 노동자의 생활 금융으로 자리 잡았다. 1960~70년대 산업화 시기, 은행 문턱이 높았던 서민들에게 계는 목돈 마련의 필수 수단이었다. 운영 방식에 따라 미리 순서를 정하는 '순번계', 매달 추첨하는 '추첨계', 매일 돈을 찍는 '일수계' 등으로 나뉜다. 1980년대 조사에서는 순번계가 70% 이상을 차지할 만큼 보편적이었다. 민법상 계는 조합 계약의 성격을 띠지만, 계주가 잠적하여 모임이 깨지는 이른바 '파계(破契)' 상황이 발생하면 계원들은 남은 곗돈을 돌려받기 위해 개별적인 민사 소송을 진행해야 하는 등 구제 절차가 매우 까다롭고 복잡하다.

이번 사건의 중심에 있는 '낙찰계'는 경매 방식을 차용한다. 가장 높은 이자를 부담하겠다고 써낸 사람에게 곗돈을 먼저 지급하는 구조다. 급전 융통에는 유리하지만 투기성이 짙다. 문제는 계주의 권력 비대화다. 규모가 커지면서 계주가 입찰 결과를 일방적으로 통보하는 방식으로 변질됐다. 공개 검증 절차가 사라진 밀실에서 횡령이 발생했다. 대부분의 계모임이 차용증이나 공증 같은 법적 효력이 있는 문서 없이 상호 간의 구두 약속이나 수기 장부로만 운영되기에, 사고 발생 시 피해 사실을 입증하기가 어려워 법적 공방에서 피해자들이 불리한 위치에 놓이는 경우가 빈번하다. 가락시장 사건은 감시받지 않는 비공식 금융이 낳은 예고된 비극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