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한국화가 김현정이 그린 한국의 초상 ㊲] 한 발짝도 못 나간 날, 그래도 나는 멈추지 않았다 -〈내숭: 마라토너〉

김연수 기자
2026-10-30 09:3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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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정, <내숭: 마라토너>, 200 x 121cm, 한지 위에 수묵과 담채, 콜라주, 2014. (출처: 김현정 아트센터)



화폭 한가운데, 한복을 입은 여인이 동네 공원에서 흔히 보는 운동기구 위에 올라 있다. 두 발을 발판에 딛고 손잡이를 쥔 채 팔다리를 앞뒤로 휘젓는, 허공에서 걷는 모양의 이른바 '공중걷기' 기구다. 보라색 저고리에 먹빛으로 번진 반투명한 치마를 입었고, 머리에는 챙만 달린 모자인 선바이저를 눈썹까지 눌러썼다. 귀에는 이어폰을 꽂았고, 오른손에는 휴대전화를 쥐었다. 발에는 꽃무늬 수가 놓인 붉은 꽃신을 신었는데, 뒷굽이 한 뼘 가까이 되는 하이힐이다. 기둥에 붙은 붉은 안내판에는 사용법 그림과 주의 문구가 빼곡한데, 여인은 그런 것에는 아랑곳없이 먼 곳을 바라보며 묵묵히 발을 구른다. 나머지 화폭은 하얀 여백이다. 트랙도 없고, 응원하는 관중도 없다. 운동기구 위의 여인은 다름 아닌 필자의 자화상이다.

제목은 〈내숭: 마라토너〉다. 삶의 치열한 순간들을 운동 경기에 빗댄 '내숭올림픽' 연작의 하나다. 이 기구는 아무리 열심히 팔다리를 휘저어도 한 발짝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다. 필자는 그 모습에서, 열심히 달려도 제자리걸음인 것만 같은 우리네 하루를 떠올렸다. 화려한 경기장이 아니라 소박한 동네 공원을 무대로 삼은 까닭도, 멈추지 않고 이어 가는 일상의 숭고함을 담고 싶어서였다. 작품 설명에는 우리 모두가 저마다의 마라토너이며, 결승점이라는 같은 목표를 두고도 도착하는 시간과 속도는 다 다르고 끝내 닿지 못하는 경우도 있지만, 중요한 것은 결과보다 달리고 있는 이 순간이 모인 과정이라고 적었다. 이어폰에서 흘러나오는 음악과 눈에 보이지 않는 가족의 응원이 지친 다리에 힘을 보탠다는 말도 덧붙였다. 반투명한 치마 아래로 비치는 다리는 우아한 겉모습 속에 감춰진 치열한 움직임을 그대로 드러낸다. 〈내숭〉 연작이 늘 그렇듯 겉과 속이 함께 보이는 장면이다.

그런데 차림새를 다시 보면 운동과는 영 어울리지 않는 것이 둘 있다. 하나는 신발이다. 땀을 흘리는 와중에도 여인은 굽 높은 꽃신을 벗지 않았다. 운동하러 나온 자리에서조차 예쁘게 보이고 싶은 마음만은 내려놓지 못한 것이다. 편하고 싶은 마음과 예뻐 보이고 싶은 마음이 한 몸 안에서 다투는 장면이고, 〈내숭〉 연작이 줄곧 그려 온 겉과 속의 어긋남이 발끝에 고스란히 드러난다. 다른 하나는 눌러쓴 선바이저다. 유럽의 공원에 가 보면 사람들은 볕이 조금만 나도 풀밭에 드러누워 온몸으로 햇빛을 받는다. 우리는 반대다. 모자에 마스크에 팔토시까지 두르고, 그늘을 골라 걷고, 기구 위에서도 챙을 한껏 내린다. 뽀얀 피부를 지키려는 마음이 크지만, 그것만은 아니다. 챙 아래로 얼굴을 반쯤 감추면 누가 나를 알아볼까, 땀 흘리는 내 모습을 누가 볼까 하는 걱정도 함께 가려진다. 햇빛을 피하는 모자는 때로 남의 눈을 피하는 가림막이기도 하다. 필자 역시 공원에 나설 때 볕보다 시선이 더 신경 쓰이는 날이 있다. 하이힐은 보여주고 싶은 마음이고, 선바이저는 숨기고 싶은 마음이다. 한 사람 안에 두 마음이 나란히 있는 것이 이상한 일은 아니다.

이 그림을 그린 지 열두 해가 지났다. 그 사이 달리기는 유행을 넘어 생활이 되었다. 문화체육관광부가 올해 1월 발표한 2025년 국민생활체육조사를 보면, 규칙적으로 운동하는 사람 가운데 주로 하는 운동으로 달리기(조깅·마라톤 포함)를 꼽은 비율은 7.7%로 한 해 전 4.8%에서 크게 늘었다. 헤럴드경제는 10월 20일 국내 러닝 인구가 약 1000만 명으로 추산된다고 전했다. 함께 달리는 모임인 러닝 크루가 동네마다 생기고, 대회도 쏟아진다. 뉴스컬처가 10월 21일 보도한 바로는 한 해 열리는 마라톤 대회가 지난해 369개에서 올해 544개로 늘었다. 10월 한 달에만 서울에서 두 개 자치구 이상의 도로를 막고 치른 큰 대회가 여섯 개였다. 이번 주 일요일인 11월 1일에는 JTBC 서울마라톤이 상암 월드컵공원에서 출발하는데 모집 인원이 3만 2000명이다. 경찰청 자료를 인용한 서울경제 보도에 따르면 2024년 한 해 마라톤 대회 참가자는 100만 8122명으로 처음 100만 명을 넘었다. 2020년 참가자가 9030명이었으니 4년 만에 100배 넘게 늘어난 셈이다.

달리기는 사람이 늘자 참가비와 용품 비용이 오르고 있다. 앞의 뉴스컬처 보도에 따르면 주요 대형 대회의 10km 참가비는 지난해 8만 원에서 올해 10만 원으로, 풀코스는 10만 원에서 15만 원으로 올랐다. 달리기 물가가 오른다는 뜻의 '런플레이션'이라는 말까지 나왔다. 신발값도 만만치 않아, 서울숲 근처에는 90분에 2000원을 내고 러닝화를 빌려 신고 뛰어 본 뒤에 사는 매장이 생겼는데, 지난달 이용 건수가 전달의 두 배를 넘었다고 헤럴드경제는 전했다. 남들 다 뛰는데 나만 안 뛰는 것 같은 조바심도 그 그늘 가운데 하나다. 거리를 재고 기록을 앱에 올리는 사이, 달리기마저 어느새 남과 견주는 일이 되어 버렸다. 몸 생각해서 시작한 일이 또 하나의 숙제가 되는 셈이다.

그림 속 여인은 그 어느 대회의 출발선에도 서 있지 않다. 동네 공원의 운동기구 위, 한 발짝도 나아가지 않는 자리에서 땀을 흘린다. 순위도 기록도 없다. 그런데 필자가 이 작품에 '마라토너'라는 이름을 붙인 까닭이 바로 거기에 있다. 결승선을 끊는 사람만 마라토너가 아니라, 제자리에서 팔다리를 휘젓는 사람도 자기 몫의 긴 레이스를 뛰고 있다는 뜻이다. 사람마다 속도가 다르고, 어떤 날은 아무리 움직여도 앞으로 나가지 못한다. 그래도 멈추지 않은 시간은 사라지지 않는다.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더라도 흘린 땀만큼 마음의 근육은 단단해진다고 필자는 믿는다.

다들 뛴다는 가을이다. 출발 신호와 함께 3만 명이 한꺼번에 상암을 빠져나가는 일요일 아침, 어느 동네 공원에서는 누군가 혼자 운동기구 위에서 발을 구르고 있을 것이다. 두 장면 모두 달리기다. 기록으로 남는 쪽과 남지 않는 쪽이 있을 뿐이다. 남의 속도와 남의 시선에 맞추느라 숨이 찰 때, 우리는 그림 속 여인처럼 제자리에서도 자기 호흡을 되찾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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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화가 김현정이 그린 한국의 초상 ㊲] 한 발짝도 못 나간 날, 그래도 나는 멈추지 않았다 -〈내숭: 마라토너〉(출처: 김현정 아트센터)



한국화가 김현정은 선화예중·예고를 거쳐 서울대학교에서 경영학과·동양화과 학사(2012년 8월 졸업, 졸업 당시 미술대학 차석에게 수여되는 서울대학교 총동창회장상 수상)와 동양화전공 석사(2015), 미술박사(2026년 8월) 학위를 취득했다. 김현정 작가는 현대 한국인의 삶과 감정을 유머와 풍자로 풀어낸 21세기 풍속도 〈내숭 시리즈〉로 널리 알려졌으며, 다수의 개인전과 전시 작품 완판, 6만 7402명의 국내 개인전 최다 관람객 기록 등으로 주목받았다. 2016년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초대 개인전을 열었고, 2015~2016년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 〈한국화 소장품 특별전: 멈추고, 보다〉에는 참여 작가 중 최연소로 참여했다. 김현정 화가의 작품은 초·중·고 교과서 31종에 수록되어 있으며, 서울시 홍보대사와 희망브리지 희망대사로 활동하고 있다. MBC 연기대상에서는 연말 방송 시상식 최초로 한국화를 무대 배경으로 선보이며 메인 작품과 로고, 포스터, 티켓, 브릿지 영상을 맡았다. MBC 일일드라마 〈가족관계증명서〉에서 동양화가인 주인공 '지니'의 그림 역시 김현정의 〈내숭〉 연작이다. 프랑스 카스텔 그룹의 스파클링 와인 뵈브 드 베르네(Veuve du Vernay) 코리아 에디션에는 서울의 풍경을 그려 넣는 등 방송과 브랜드를 넘나드는 협업을 이어가고 있다. 지은 책으로는 그림에세이 《김현정의 내숭》, 컬러링북 《내숭이야기 컬러링북》, 《한국화를 배우는 시간: 개념편》, 《한국화를 그리는 시간: 실기편》 등이 있다. 또한 김현정 작가는 2026년부터 경희대학교 교육대학원(미술교육전공)과 미술학부 겸임교수로 재직하며, 수원대학교·대구대학교 겸임교수와 성신여자대학교·용인대학교·안양예술고등학교 강사를 역임했다. 전통 회화와 동시대 시각문화를 연결하는 강연과 강의를 이어가며, 30만 팔로워와 소통하고 국내외 전시·교육·집필·칼럼을 통해 한국화의 새로운 가능성을 확장하고 있다.

글_김현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