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bnt K-POP 리더|윤등룡①] 베이비복스와 두드린 아시아의 문… 윤등룡이 간직한 무대 밖의 기억

미국 녹음실에서 태어난 이름, 중국 무대를 향한 도전… 베이비복스와 함께 남긴 나눔의 발자취
김민주 기자
2026-10-02 15:5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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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알뮤직 윤등룡 대표


성공보다 먼저 떠오른 건, 함께했던 얼굴들이었다

베이비복스가 오랜만에 완전체로 무대에 섰을 때, 윤등룡 디알뮤직 대표는 직접 보러 가지 못했다. 보고 싶지 않아서가 아니었다. 함께했던 멤버들을 마주하면 울 것 같았다고 했다. 해외 무대에 오르기 위해 공항과 호텔을 오가던 어린 멤버들의 모습이 그의 기억에 남아 있었다. 한 팀을 만들고 새로운 시장을 찾아 나섰던 제작자의 이야기는 그렇게 멤버들에게 남은 미안함에서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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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평양 공연 후 윤등룡 대표와 베이비복스


베이비복스의 해외 활동을 이야기하는 그의 답변에는 서로 다른 장소가 등장한다. 첫 앨범을 녹음한 미국의 녹음실, 중국 진출의 가능성을 확인한 CCTV 무대, 태국의 보훈병원, 베이징 인근 시골 마을의 학교다. 음반을 만들고 공연을 이어가는 동안 한국 음악을 알리는 일은 현지 사람들과 마음을 나누는 일로 넓어졌다. 그 장소들을 따라가면 윤등룡이 베이비복스와 함께 걸어온 길이 보인다.

출발은 음악과 거리가 있었다. 그는 세계적인 스포츠 브랜드를 만들고 싶어 체육사를 운영했다. 가수 최백호와 인연을 맺은 것이 음악계에 발을 들이는 계기가 됐고, 이후 송골매 구창모의 제작 제안을 통해 본격적으로 음악을 접했다. 처음부터 음반 제작자의 인생을 계획한 것은 아니었다. 사업을 하며 만난 사람이 다른 세계로 이끌었고, 여러 경험을 거치며 음악 제작이 그의 일이 됐다.

베이비복스를 기획한 이유도 뜻밖이다. 밴드 활동에서 실패를 겪은 뒤 다시 록 음악을 하기 위한 자금을 마련하고 싶었다. 그 방법으로 걸그룹을 생각했다. 훗날 자신을 대표하는 팀이 될 베이비복스는 처음에는 접어두었던 록 음악의 꿈을 다시 이어가기 위해 시작한 기획이었다. 팀의 탄생을 설명하며 그는 그 동기를 숨기거나 더 근사한 이야기로 바꾸지 않았다.

그가 모델로 삼은 팀은 스파이스 걸스였다. 음악의 방향은 미국을 향했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1996년 미국에서 첫 앨범을 녹음했고, ‘베이비복스’라는 이름도 당시 녹음실에서 탄생했다. 팀을 국내에 알리는 일에 앞서 해외에서 음악을 만드는 경험부터 한 셈이다. 아시아 여러 나라의 무대에 서게 되는 베이비복스의 이름이 처음 붙은 곳은 미국의 녹음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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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뷔 초기 베이비복스


첫 앨범의 결과는 실패였다. 해외에서 녹음하고 새로운 팀을 내놓았지만, 기대했던 성공으로 이어지지 않았다. 이후 멤버 개편을 거치며 팀의 색깔을 찾아갔고, 두 번째 앨범부터 성과를 거뒀다. 그의 답변에서 베이비복스의 성장은 처음부터 맞아떨어진 기획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첫 시도가 어긋난 뒤 팀을 다시 구성하고, 대중에게 닿을 수 있는 모습을 찾아간 시간이 있었다.

록 음악을 다시 하기 위해 만든 걸그룹이 성공하면서 윤등룡의 다음 선택도 달라졌다. 그는 베이비복스의 활동 무대를 아시아로 넓히고자 했다. 한국에서 정상에 오르지 못한다면 아시아로 나가자는 생각이었다. 국내에서의 반응을 팀의 최종적인 가능성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다른 나라의 관객 앞에서도 그 가능성을 확인해보려 했다.

그 선택의 중심에는 중국이 있었다. 윤등룡은 당시 중국의 경제와 문화가 달라지는 모습에 주목했다. 시장경제가 확대되는 사회에서 대중문화가 어떻게 받아들여질지 관심을 가졌다. 한국의 음악과 공연을 현지에 소개하는 일이 어떤 반응으로 돌아올지, 제작자로서 직접 알아보고 싶었던 시장이었다.

중국 CCTV 무대에서 그는 베이비복스의 가능성을 확인했다고 회고했다. 중국 진출을 생각하는 것과 현지에서 실제로 무대에 서는 것 사이에는 거리가 있었다. CCTV에서의 경험은 그 구상을 계속 추진할 근거가 됐다. 베이비복스는 중국을 중심으로 활동 범위를 넓혔고, 윤등룡은 한국 밖에서도 팀이 성장할 수 있다는 확신을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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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징에서 열린 비•베이비복스 합동콘서트


그가 떠올린 활동 지역에는 대만과 홍콩, 몽골과 베트남, 우즈베키스탄과 러시아, 유럽 등이 포함된다. 미국 음악을 지향하며 출발한 걸그룹은 아시아에서 기회를 찾았고, 더 먼 곳까지 활동을 이어갔다. 하나의 시장에서 반응을 얻은 뒤 다른 지역으로 향하는 동안 제작자는 새로운 가능성을 살폈고, 멤버들은 각국의 낯선 환경을 몸으로 겪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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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 비 중국 첫 진출 기자회견 모습 / 아래 : 베이비복스 공연 모습


그 일정의 밀도를 보여주는 기억이 있다. 하루에 세 나라를 오갈 정도의 강행군이었다. 윤등룡은 이를 해외 활동의 규모를 자랑하는 사례로 꺼내지 않았다. 멤버들에게 미안하게 남아 있는 일로 이야기했다. 지도 위에서 활동 국가가 늘어나는 만큼 어린 가수들이 감당해야 할 이동과 피로도 커졌다.

호텔과 공항에서 자유롭게 움직이지 못했던 경험도 그의 회고에 담겼다. 당시 멤버들은 어린 나이에 익숙하지 않은 환경에서 활동했다. 윤등룡은 그들이 그때는 자신의 경험이 얼마나 고된지 충분히 알지 못한 채 버텼을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제작자의 눈에 들어왔던 다음 무대와 다음 시장을 멤버들은 빠듯한 하루하루로 통과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대목에서 그는 멤버들이 겪은 일을 성공의 대가로 정리하지 않았다. 제작자로서 지금까지도 미안한 마음을 갖고 있다고 했다. 지나간 일정은 되돌릴 수 없지만, 회고하는 자리에서 무엇을 먼저 기억할지는 선택할 수 있다. 윤등룡은 베이비복스가 어디에서 활동했는지를 설명하면서 그 무대에 서기까지 멤버들이 겪은 어려움도 함께 남겼다.

해외 진출에는 그가 지키고자 했던 또 다른 원칙이 있었다. 문화가 전파될 때는 반드시 베풂이 동행해야 한다는 생각이다. 한국의 음악을 좋아해주는 사람들을 만났다면 감사의 마음도 전해야 한다고 봤다. 공연을 통해 현지의 관심을 얻는 일과 그곳에 무엇을 보탤 수 있을지 생각하는 일을 함께 두었다.

태국에서는 공연을 마친 뒤 한국전쟁 참전자들이 있는 보훈병원을 방문했다. 윤등룡의 설명에 따르면 베이비복스 멤버들은 부상자들의 발을 직접 씻겨드렸다. 공연장의 관객을 만난 가수들이 한국을 위해 싸웠던 사람들을 찾아간 것이다. 그가 기억하는 베이비복스의 해외 활동에는 무대의 조명 밖에서 이루어진 이런 만남도 포함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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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켓 지진•해일 피해 지역을 방문한 베이비복스


중국에서는 낙후 지역을 돕는 희망공정 관련 프로그램에 참여했다. 베이징에서 약 한 시간 반 떨어진 시골 마을에 전산학교 두 곳을 짓는 일도 했다고 설명했다. 중국 시장을 개척한 경험을 돌아보며 그가 함께 떠올린 것은 현지의 교육을 지원했던 일이었다. 한국 가수의 활동이 공연장을 넘어 마을과 학교로 이어진 사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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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사랑태국자원봉사단으로 참여한 베이비복스


보훈병원에서는 한국이 받은 도움에 감사했고, 중국에서는 현지의 교육을 지원했다. 윤등룡이 생각한 한류에는 두 방향이 함께 있었다. 한국의 음악과 문화를 전하는 것, 그리고 한국을 향한 관심과 과거의 도움에 마음으로 응답하는 것이다.

그 바탕에는 대한민국에 대한 애정이 있었다. 윤등룡은 대한민국을 굉장히 사랑하며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한국을 알리는 데 집중했다고 했다. 한국 여성의 강인함을 믿었고, 세계적인 걸그룹이 한국에서 나올 것이라고 생각했다. 베이비복스를 해외로 이끈 선택에는 새로운 시장을 찾으려는 판단과 한국 가수의 가능성에 대한 믿음이 함께 있었다.

자신의 역할에 대해서는 디알뮤직이 해외 진출의 등용문이었고, 한류의 확장과 새로운 시장을 여는 데 일정 부분 기여했다고 평가했다. 그가 돌아본 제작의 시간은 베이비복스가 경험한 무대와 그 이후의 해외 활동으로 연결된다.

그는 개척자는 만신창이가 된다는 생각이 들 만큼 힘든 시간을 보냈다고 했다. 첫 앨범의 실패, 팀의 재정비, 여러 나라를 오가는 강행군까지 베이비복스가 겪은 일들은 그 짧은 표현에 포개진다. 미국의 녹음실에서 시작할 때는 그 여정이 어디까지 이어질지 알 수 없었다. 다시 록 음악을 하기 위해 만들었던 팀은 그의 제작 인생에 아시아라는 무대를 남겼다.

미국 녹음실에서 붙인 이름은 아시아 여러 나라의 무대에 올랐다. 그 사이 공연을 마친 멤버들은 보훈병원을 찾았고, 활동의 인연은 시골 마을의 학교에도 닿았다. 윤등룡이 돌아본 베이비복스의 시간에는 음악을 통해 넓어진 세계와 그 일을 함께 해낸 사람들의 수고가 나란히 남아 있다.

베이비복스가 앞서 개척한 아시아 시장에서 후배들이 활동할 수 있게 됐다는 이야기를 들을 때면 그는 자신들의 길이 틀리지 않았다고 느낀다. 하지만 함께 길을 열었던 멤버들을 떠올리면 여전히 미안한 마음이 남는다. 윤등룡에게 베이비복스는 성공의 기억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이름이다. 새로운 시장을 향해 나아갔던 도전과 그 과정에서 함께했던 사람들의 시간, 그리고 그들에게 전하지 못한 미안함까지 함께 남아 있는 이름이다.

아시아의 문을 두드렸던 제작자는 지금, 그 문을 함께 열었던 멤버들의 시간을 다시 돌아보고 있다.

김민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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